[PD저널=오학준 SBS PD] 공장 지붕, 혹은 톱날을 연상시키는 백색의 바우하우스 아카이브 건물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다 보면 한 의자를 만나게 된다. 앙상하고 차가운 금속의 뼈대, 그리고 그것들을 가로지르는 직물 시트로 이루어진 안락 의자. 마르셀 브로이어의 바실리 체어다.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통합이라는 독일 바우하우스의 목표를 체현하는 사물이다.몇 년 전 베를린에서 마주한 그 의자엔 새로운 소재, 새로운 기술, 새로운 사상과 시대가 교차하고 있었다. 단단한 강관, 그리고 그 강관을 구부릴 수 있는 기술, 대량생산에 용이하도록
[PD저널=오학준 SBS PD] 어느 날 찾아온 고통에 천직이라 생각했던 일을 잠시 내려놔야 했을 때, 나는 나를 책망하기 바빴다. 심신이 지쳐서 예민해진 탓이니, 좀 쉬면 나아질 거란 위로는 따뜻했지만 한편으론 참담했다. 이 비일비재한 일을 견뎌내지 못한 무른 성격이 문제의 원인이 된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긴 유랑을 끝내고 돌아온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나를 ‘치료’의 과정 속에 두고 본다. 불편한 시선들의 무게는 조금씩 망가진 우리들로 하여금 ‘멀쩡함’을 연기하게 만든다. 조한진희의 라는 책을 펼쳐
[PD저널=오학준 SBS PD] “이것 봐, 나무 끝이 파랗게 돋아 났어.” 아직 채 추위가 가시지 않았던 날, 남산을 함께 걸어 내려오던 엄마가 개나리나무 끝을 가리켰다. “봄이 왔다 착각한 모양이다. 이러다 얼어 죽는데.” 엄마는 나무가 온 힘으로 밀어낸 새싹 끝을 더듬거렸다.산골에서 태어나 수십 년간 같은 풍경을 맞이한 엄마는 때이른 봄맞이의 결말을 안다. 손끝이 안타까웠다. 때를 모르는 식물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한숨 섞인 말들이 불안하게 피어 올랐다.수십 년간 비슷했던 날들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산림청에선 최근, 식목일을
[PD저널=박수선 기자] 국내 진출 5년 만에 한국 콘텐츠 시장의 ‘큰손’ ‘블랙홀’로 떠오른 넷플릭스가 광폭 행보를 이어간다. 올해 5500억원을 한국 콘텐츠 제작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넷플릭스는 오리지널 시리즈뿐만 아니라 오리지널 영화 제작에도 나선다는 계획이다. 넷플릿스는 25일 오전 콘텐츠 로드쇼 을 열고 한국 진출 5년의 성과와 올해 선보일 작품 라인업 등을 공개했다. 콘텐츠 강자로 자리를 굳힌 넷플릭스의 위상을 반영하듯 이날 행사에서 공개된 작품과 출연진은 화려했다.
[PD저널=오학준 SBS PD] 이사하기로 했어, 작은 집으로. 엄마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방에 꽂힌 책들이 처음으로 거추장스러웠다. 그간 집이 계속 넓어져 온 탓에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았던 문제였다. 헐값에 울며 중고 책방에 넘겨야 할까? 아니면 책 위에 누워 잠들어야 할까? 미니멀리즘과 맥시멀리즘 사이를 널뛰기하다, 간신히 이 책들과 함께 춤출 공간이 남는 집을 찾았다. 부랴부랴 전세 계약을 마치고 돌아오니 한밤이었다.밤으로 물든 집 마루에 주저앉아서야 다시는 이곳에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돌아온다 해
[PD저널=오학준 SBS PD] 칼날 같은 바람이 눈을 흩어 밤하늘을 희뿌옇게 물들이면, 사람들은 종종걸음을 하며 골목길로 사라진다. 저마다 방에서 녹아 내리는 밤이 지나면, 자동차조차 맥없이 미끄러지는 아침이 온다. 카메라가 지각과 사고로 초췌해진 시민들의 얼굴을 비추는 동안, 얼어붙은 박스들 위로 쏟아지는 나지막한 한숨은 그저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세상에서 가장 추운 사막을 건너야 하는 노인들의 절망은 화면으로 중계되지 않는다.돌아오지 못할 길을 나선 그들이, 길 위에 쓰러진 연후에야 가난은 주목을 받는다. 다만 언제나 굴절된다
[PD저널=오학준 SBS PD] 벨이 울려 나가보니 서명 용지를 든 주민 한 분이 인사를 건넸다. “부모님 안 계세요?” 그날은 나만 휴무였다. “서명 대신 해주시겠어요?” “제가 해도 되나요?” “그럼요, 다 좋은 일 하는 건데요 뭐.” 무슨 좋은 일일까 싶어 서명 용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파트 이름 변경 동의서. “이름을 바꾸나요?” “이젠 브랜드 아파트 시대지요.” 30년 가까이 된 아파트도 브랜드를 가질 권리는 있으니.건설회사는 너무 오래된 아파트라서, 브랜드 가치 때문에 최신 아파트 이름을 함부로 내줄 수 없다고 버텼
[PD저널=오학준 SBS PD] 최근 한 배달업체는 배달 노동자의 안전을 보장하고, 배차 효율을 높이기 위해 인공지능이 배달노동자를 선택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도입 명분은 좋은데, 배달 노동자들은 이를 아직 신뢰하지 못한다. 동선이 비정상적으로 그려지거나, 예상 도착 시간이 부정확한 경우들이 많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할당된 호출을 쉽게 거부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이동하다 보면, 위험에 더 쉽게 노출된다고 하소연한다.AI가 할당한 배달을 수행하다 사고가 나면 누가 책임져야 할까? 배달 노동자들은 이것은 업무 지시이니 사업자가 고용주
[PD저널=오학준 SBS PD] “공동묘지를 밀고 아파트를 지어서 불길한 거래.” 아파트 단지에서 누군가가 투신한 다음날, 학교에서 만난 친구는 내 귀에 대고 이 말을 속삭였다. 그 중학생 소년의 손엔 금빛으로 번쩍이는 L로드가 들려있었다. 이걸 들고 방에 들어가면 수맥을 찾을 수 있다는데, “침실에서 이게 움직이면 어쩌지?”그날 밤 그의 걱정이 내게 옮았다. 옷걸이를 펜치로 잘라 두 손에 들고 방으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갔다. 달빛에 비친 그림자가 귀신처럼 보였다. 아무렇게나 말아 올린 커튼이 마치 사람 얼굴처럼 보이는 듯하자 손아
[PD저널=오학준 SBS PD] 9월 18일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연방대법관으로 보수 성향의 에이미 코니 배럿 판사를 후임으로 지명했다. 상원 다수당인 공화당에선 지명 이전부터 인준 청문회와 투표를 진행할 것이라 선언한 상태였다. 민주당은 2016년 오바마 대통령이 같은 상황일 때 공화당이 인준을 거부하고 내세운 논리를 들어 후임 대통령에게 지명권을 넘겨야 한다고 항의하고 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을 것 같다.트럼프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규칙을 존중하지 않는 언사들을 남발해왔
[PD저널=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금수저에서 금수저 나고 흙수저에서 흙수저 난다? 이른바 ‘수저계급론’이 건드리는 불쾌감은 태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운명론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모가 가진 돈과 지위가 자식에게 이어지는 건 우리 사회의 익숙한 풍경이 됐다. 70~80년대까지만 해도 가난한 집에서 좋은 대학을 간 수재가 신분상승을 하는 스토리는 개연성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끊긴 지금, 이런 이야기는 더 이상 개연성을 찾기가 어렵다.tvN 월화드라마 은 바로 그 수저계급론의 불쾌한 세상
[PD저널=오학준 SBS PD] 반세기 전의 강연이 지금 출간된 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세상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거나, 달라진 오늘을 충실히 예측했거나. 1967년 4월 6일, 오스트리아 사회주의학생연합의 초청을 받은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빈 대학에서 진행한 은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강연처럼 보인다.1967년은 위기의 해였다. 독일의 국민총생산은 독일연방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1964년 창당한 극우주의 정당 독일민족민주당은 브레멘을 포함해 주 의회 다섯 곳에 진출하는
[PD저널=오학준 SBS PD] 마스크가 정치적 의견의 표현 수단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과학적인 조언들은 종교적, 정치적 신념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대통령이 나서서 주장하는 비과학적 유언비어와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가 마스크 대신 그들의 입을 덮었다. “신념은 총알로도 뚫을 수 없다”던 브이의 대사는 완전히 전도(顚倒)됐다.바다 건너 이곳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다. 연단에 오른 종교인은 정치적 이유로 환자 수가 조작되고 있다고 했다. 야외에선 바이러스가 전파되지 않는다며 마스크를 벗기도 했다. 그의 말을 진지하
[PD저널=이준엽 기자] 영화와 드라마의 크로스오버, OTT 선공개 등 파격적인 시도가 돋보인 MBC 시네마틱드라마 이 안방의 시청자들까지 사로잡을 수 있을까. OTT‘웨이브’에서 먼저 공개돼 60만명 이상 시청한 은 한국판 오리지널 SF 앤솔러지(anthology) 시리즈를 표방한 작품이다. 제작에 참여한 영화감독들은 방송에 앞서 13일 열린 미디어간담회에서 제작 과정을 돌아보면서‘흥미로운경험이었다’고 입을 모았다.은 미디어 환경 변화에 따라 플랫폼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다양한 형식의 콘텐츠가 쏟아지고
[PD저널=오학준 SBS PD] 며칠 전 에서 메일이 왔다. “$0.50 a week for the facts.”라는 제목의 메일에는 한 달 구독료를 월 2$에 맞춰주겠다는 제안이 담겨 있었다. 잠시 솔깃했다. 가짜뉴스의 시대에 양질의 뉴스를 푼돈으로 얻을 수 있는 기회니까. 한편으론 당황스러웠다. 매출이 유지가 될까? 실제로 뉴욕 타임스는 2000년대 초반에 비해 구독자 수가 5배가량 늘었지만 매출은 오히려 절반으로 줄었다. ‘사실’의 가격은 2$면 충분한 것일까.사실의 가격이 급락하는 이면엔 번성하는 가짜뉴스 시장이
[PD저널=오학준 SBS PD] 험난한 진수식(進水式)이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라는 배를 띄우기 위해 10명의 선원이 모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새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한 지 19년, 2006년 인권위가 정부에 차별금지법 입법을 권고한 지 14년, 민주당이 보수 개신교 단체의 항의로 법안을 자진 철회한 지 7년의 시간이 흘렀다. 많은 의원들의 이름을 달고 나타났다 사라졌던 차별금지법은 7년 만에 앞선 법안들이 머문 물가에 다다랐다.오랜 시간 차별금지법이 표류하는 동안 괴롭힘, 혐오 표현, 간접 차별과 같은 새로운 차별의 유형
[PD저널=오학준 SBS PD]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현금의 ‘직수효과’는 굉장했다. 팬데믹으로 얼어붙었던 소비가 늘고, 집권 3년차 정부 지지율은 60%를 넘겼다. ‘매표’행위라며 비아냥대던 목소리도 어느새 사라졌다. 기획재정부 장관은 추가 재난지원금은 없다고 선언했지만, 정치권 이곳저곳에선 기본소득을 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팬데믹은 기본소득을 정치의 장으로 빠르게 끌어들였다. 2016년 청년배당을 이야기하던 때완 사뭇 다른 분위기다. 잔뼈가 굵은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도 진의야 어떻든 기본소득을 언급했다.지름길의 폐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