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어린 시절의 꿈과 희망을 다룬 영화들을 접할 때면, 우리는 의례히 ‘성장영화’다, ‘청소년영화’다 해서 은근히 그 영화의 특성을 일방적으로 재단하고 카테고리 화하는 경향이 있다. 단지 청소년이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중한 이야기들을 놓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흔히들 영화가 종합예술이라고 불리는 연유가 있을 진데, 한때 그 시절을 겪어 보았다
18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후, 점점 더 기계화되고 산업화되어가는 인간의 문명은 어느덧 그 위험성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것 같다. 보다 나은 삶을 지향하며, 인간사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과학기술은 이제 거대 자본과 결합하여, 결과적으로 사유의 존재이던 인간을 생산과 소비의 존재로 격하(?) 시켰다. 어떻게 하면 더 생산하고 더 소비하게 할 것
한때는 방송관련 직종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이 있었다. 화려한 조명과 터질 것 같은 사운드, 그리고 거기에 열광하는 수많은 시청자들을 당연시 여기며, 왠지 카리스마가 철철 넘칠 것만 같던 방송 연출자의 세계! 그 세계를 필자 역시 무던히도 동경했다. 1980년대 후반 대학시절을 보낸 필자로서는 꿈의 직업군이었던 언론 종사자, 그 중에서도 TV 프로듀
세상 속 다양한 경험에 길들여지면서도 때때로 삶의 이면들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된다. 그러나 이미지 시대가 도래한 뒤,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무차별적인 시각적, 청각적 자극들은 오히려 우리의 판단을 현혹시키며 현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어렵게까지 하는 듯 싶다. 보다 더 빠르게, 보다 더 신속하게, 그리고 항상 새로워야만 하는 디지털 이미지 시대를
5월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함께 있는 이 달은 가정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인 부모와 자식을 기리는 날이 모두 있으니 다른 달과는 지 다르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바쁜 일상사를 잠시 접어두고 자식과 또는 부모님과 함께 하루정도를 되돌아보며 보낼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5월은 충분히 만족스럽다. 주변의 날씨 또한 1년 중 가장 쾌적한 기운을 선
음주가무(飮酒歌舞)란 말이 있다. 굳이 자세히 언급을 안 해도 이 말이 우리 민족의 한 특성을 일컫는 말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한반도라는 특수한 지리적, 정치적 상황 속에서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쳐가면서까지 지켜온 단일민족의 혈통 속에 흐르는 특성이 음주가무라니, 조금은 이상하기도 하다. 21세기가 도래한 이후, 기존 서방 중심의 문명에서 점
완연한 봄이다. 필자는 이런 활짝 개인 봄날의 바다를 더 좋아한다. 바다하면 작렬하는 태양아래의 여름바다니, 세찬 바람을 마주하며 소주 한잔 걸칠 수 있는 낭만의 겨울바다니 하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가 있을 런지는 모르나 필자는 봄이나 가을 무렵의 바다가 더 좋다. 다소 밋밋한 것 같지만 결코 쉽게 지나쳐버릴 수 없는 묘한 기운! 계절이 변해가는 4~5월과
지난 주, 극장이나 연주장에서 감상의 대상으로 듣던 음악이 특정 상황 하에서는 오히려 인간행동을 통제할 수도 있음을 알아봤다. 그저 단순한 감성의 도구로만 생각해왔던 음악이 오히려 그 감성적인 요소를 십분 활용해 이성을 마비시키고 주체적 판단을 유보케 하는 심리적 요소로 기능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필자는 무척이나 우울해졌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인간처럼 나약한 존재가 있을까? 일찍이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했던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85?~BC 414?)가 아니더라도 만물의 영장이자, 신의 위대한 창조물인 인간의 고귀함과 우월성에 대한 찬사는 기록문화가 생겨난 이후, 다양한 형태로 이어져왔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할수록,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신의 영역에까지 도전하려고 하는
4월이다! 봄기운이 농익은 과일처럼 무르익는 깊숙한 계절의 맛을 느끼는 순간, 봄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저만치 물러가 있으리라. 주변의 당연시 해왔던 것들의 소중함을 깨달은 순간, 모든 것이 덧없이 사라져가는 안타까움을 항상 뒤늦게 아쉬워하는 일상의 바보(?)처럼 계절의 아름다움 또한 본인에게는 돼지 앞의 진주일 뿐인 듯싶다. 담장 위 따사로운 햇살을 받고
어느덧 완연한 봄이다. 3월초만 해도 꽃샘추위다 뭐다 해서 옷깃을 여미게 만든 날씨도 이제는 수줍은 소녀 도망가듯 소리 소문 없이 그 모습을 감추고 있는 듯하다.따사로운 햇볕의 여유와 함께 느껴지는 주변의 푸르른 생명력 속에서 문득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한마디가 생각이 나는 것은 왜일까? - “세상에는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얻으려 하다가 결국엔 모든 것
벌써 3월, 만물이 생성하는 봄이다. 이 글을 연재할 무렵, 뜨거운 커피 몇 잔 없이는 도저히 엄두도 나지 않을 것 같던 추운 공기 속 책상위에서 힘겹게 몇 자 써내려 가느라 고군분투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제법 따사로운 봄볕만으로도 골머리를 식힐 수 있는 여유마저 생겼다. 나이가 들어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당연한 자연의 이치를 당연하지만은 않
오늘은 요하네스 베르메르(1632~1675)란 화가의 작품을 다룬 영화 한편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그간 영화는 종종 화가의 작품들에서 그 형태와 아이디어를 차용해 왔다. 이 점은 굳이 하나하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나 로만 폴란스키, 그리고 가까이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 같은 거장들의 작품에서도 손쉽게 찾 아볼 수 있다. 어쩌면 수많은
요사이 시간이 참으로 빨리 지나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생각해보면 갓 입사해 조연출로 설레는 마음을 안고 프로그램에 배치된 지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세월은 입사17년차를 바라보며 달려가고 있었다. 추웠던 겨울이 가고, 서서히 따사로운 봄의 기운을 느끼는 2월의 오후, 책상 모퉁이에서 문득 나는 어떠한 속도로 달려 왔는가 하는 궁금증이 이는
얼마 전 필자는 재미난 영화 두 편 와 을 다시금 볼 기회가 있었다.이 영화는 실은 ‘쇼데를로 드 라클로’라는 프랑스의 소설가가 1782년 프랑스 혁명 직전의 문란하고 퇴폐적인 상류사회의 인간 군상들을 다룬 서간체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이 작품은 소설 속 주인공인 발몽자작과 메르떼이유 후작부인이 위선과 가식
영화 속 음악은 극중의 분위기를 좌우하며, 때때로 영화자체보다도 관람객의 주목을 끌기도 하는 주요 요소다. 그러나 가끔씩 영화를 보다보면, 충분히 나설 수(?) 있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뒤에서 극중 분위기를 이끌어 내고 있는 아주 겸손한 음악의 존재를 발견하곤 한다. 어찌나 겸손한지 영화를 보고 난 뒤, 곧바로 그 음악을 다시 들려줘도 해당영화와 멜
필자가 바하와 영화 속 음악에 대해서 언급한지도 벌써 3주째 되어가는 듯하다.서양의 바로크 음악! 더군다나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작품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학창시절, 필자가 기억하는 바로크 음악은 음악의 아버지 바하, 음악의 어머니 헨델로 대표되는 따분함의 연속이었다. 거기다가 음악의 아버지라니…….무슨 별칭이 그러한가? 그렇다면 베토벤은 음악의 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