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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의 기본은 발음이다



연기자는 연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매번 타인의 삶을 살면서 그 삶에 진정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 혹은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연기자 누구나 듣고 싶은 말은 '연기 잘한다'는 평가겠지만, 그런 상찬을 듣는 연기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렇다면 좋은 연기의 기본 조건은 무엇일까? 어쩌면 너무 많은 조건들이 줄줄이 따라 붙겠지만 시청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가장 첫 줄에는 '발음'이 적혀 있어야 할 것 같다. 눈빛 연기도 좋고 눈물 연기도 좋지만, 연기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 게 일단 우선이다.

일부 젊은 연기자 가운데에는 특히 이중모음 발음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관심'을 '간심'이라 발음하고, '회사'를 '해사'라 하며 '재회'를 '재해'라고 발음하는 것이다. (현재 방영중인 한 드라마에서 들었던 단어들이다) 발음상에 원래부터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혹은, 그렇게 발음하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제발 아니길 바란다) 연기자에게 발성과 발음을 빼면 대체 무엇이 남을까? 연기파 배우에게 주어지는 흔한 칭찬은 '혼신을 다한 열연' '믿을 수 없는 몰입' 같은, 어쩌면 상투적인 표현들이다.

그러나 '회사' 발음도 못하는 배우가 혼신을 다할 수 있을까? '재회'를 재해'라고 태연하게 발음하는 연기자를 지켜보는 것은, 그야말로 '재해' 같은 일이다. 슬픈 연기를 하며 눈물을 쏟아도, 그 부족한 발음은 시청자의 몰입을 결정적으로 방해한다.

연기자에게 무슨 아나운서가 되기를 촉구하는 것이 아니다. 명확한 발음과 잘 훈련된 발성은 연기력의 든든한 토양이고 자양이다. 고등학교 연극반에서도 대본을 열기 전에 발성과 발음 연습부터 시작한다. 그런 태도는, 연기력 향상을 위해서라기 보다 극장을 찾아오는 관객에 대한 예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배우의 대사란 모름지기 대극장 맨 뒷줄에 앉은 노인의 귀에도 선명하게 잘 들려야 한다.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먼 길을 찾아온 관객에 대한 예의란 그런 것이다. 비록 먼 길을 찾아온 건 아니지만, TV드라마를 지켜보는 시청자들도, 화면에 등장한 연기자에게서 그런 예의와 노력을 보고 싶다. 예쁘고 잘생긴 얼굴, 근사한 패션 감각도 오늘날 연기자들의 중요한 미덕임에 틀림없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적어도 CF모델이 아니라 연기자라면. 방영중인 <하얀거탑>이 화제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른 바 '연기의 기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연기자가 연기를 잘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도, 연기자들이 잘 훈련된 발성으로, 칼 같은 발음에 담아서 들려주는 대사들은 그 자체로 새삼스러운 감동을 준다.

젊은 연기자들이 곧잘 '로버트 드 니로'나 '메릴 스트립'을 닮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대개 두 배우의 변화무쌍한 연기 변신에 대한 존경의 뜻을 담고 있다. 그 명배우들의 기본기도 역시 발음과 발성이다. 젊고 가능성 있는 배우들을 발굴해서 '키운다는' 소속사들은 그 젊은 새싹들에게 가장 기본이 되는 발음 수업부터 가르쳤으면 좋겠다. 그 연기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들어서 리모콘 볼륨을 키우다가 다른 채널로 돌려버리는 불상사가 있기 전에. 조 지 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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