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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 표현하려는 ‘꿈과 의지’, 영화 탄생의 원동력
최상식
KBS 드라마제작국장

|contsmark0|1. 영화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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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성서에는 우주의 창조가 빛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태초에 신이 내린 첫 명령어는 바로 “빛이 있어라!”였다. 영상의 역사도 빛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빛과 어둠이 빚어내는 환영(幻影)이 바로 영상의 세계인 것이다. 13세기에 건축된 파리의 카테도라르상 샤데온 사원(寺院)엔 스테인드 글라스의 걸작이 있다. 이곳에 햇빛이 통과하면 반사광이 신비롭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냄과 동시에 태양의 이동에 따라 변화하는 영상이 환상적인 이미지를 연출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1644년 수도승 키르허(athanasius kirher)는 이러한 원리를 응용하여 환등기를 만들게 된다. 당시 환등기를 이용한 슬라이드 영사는 신기한 구경거리로서 유럽전역에서 인기를 끌게 되었고 그 관객이 훗날 영화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2만 년 전, 석기인들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알타미라 동굴벽화엔 달리는 들소의 모습이 마치 살아 움직일 듯 역동적인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들소의 다리를 여덟 개로 그려 놓은 것도 있다. 마치 느린 셔트 속도로 달리는 동물을 촬영한 다중 노출사진의 영상과 흡사하다. 이 그림 속엔 뭔가 움직임을 표현하고자 하는 원시 인류의 ‘꿈과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꿈과 의지’야말로 영화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1824년 영국의 로제트(peter mark roget)가 ‘시각의 잔상현상’에 대한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움직이는 영상을 얻기 위한 인간의 탐구는 가속이 붙기 시작한다. 1825년 파리스(john ayrton paris)는 종이 원판 양쪽에 있는 실을 잡아당기면 원판이 돌아가면서 양면에 그려진 두 그림이 겹쳐서 하나의 그림으로 보이게 한 쏘마트로프(thoumatrope)를 선 보였고, 호너(williamm horner)는 ‘돌아가는 인생’이란 뜻의 죠트로프(zoetrope)를 고안하였는데, 이 완구는 원통이 돌아가면 그 속에 배열된 연속그림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장치였다. 1870년대 말 에밀 레이노(emie reynaud)는 죠트로프를 보다 개선하여 그 셔트 원리를 환등과 결합시킨 프락시노스코프(fraxinoscope)를 완성하고 자신이 손수 그린 연속만화를 상영함으로서 만화영화 탄생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오늘과 같은 실사 필름이 상영되기 위해서는 카메라와 사진술의 발명이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했다. 사진술의 발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1822년경부터 실험을 진행시켰던 니엡스(joseph nisephore niepce)와 다게르(lduis daguerre)이다. 1837년에 다게르에 의하여 은판 사진술이 발명되고, 뒤이어 탈보트(fox talbot)가 사진의 복제가 얼마든지 가능한 탈보트 타잎을 개발함으로서 사진이 점차 대중화하기 시작한다. 또한 사진술의 발달과 함께 연속사진으로 동물이나 인체의 동작을 분석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진행되었다. 1889년 10월 6일 딕슨(loure dickson)은 고용주인 에디슨 앞에 새로운 발명품인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내놓았다. 이 활동사진기 속에는 딕슨 자신의 모습이 담긴 필름과 목소리가 담긴 레코드가 들어있었다. 이 순간이 활동사진의 실존을 알리는 첫 시위였으며 토키영화의 첫 등장을 알리는 최초의 사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키네토스코프는 대중에게 영사하는 방식이 아니었고 한사람이 들여다 볼 수 있게 꾸며진 상자형태였으며, 피아노 만한 크기에다 무게도 많이 나가 기동성이 약한 흠을 지니고 있었다. 에디슨은 키네토스코프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지 특허권을 얻을 당시 국제 복사표절 위원회에 지불할 150불의 부가금을 거절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수많은 모방품들이 나오게 되었고, 결국엔 영화 역사의 기원을 프랑스 측에 넘겨주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 에디슨은 이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louis & auguste lumiere)는 키네토스코프의 약점을 개선하여 작고 가벼우며 기동성이 뛰어난 시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e)를 개발하였다. 시네마토그라프는 촬영과 현상은 물론 영사기의 기능까지 갖춘 삼위일체의 기계였다. 뤼미에르는 이 새로운 활동사진기의 장점을 이용하여 거리로 나가 사람들의 일상(日常)과 풍물을 찍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까퓨시느가(街)에 위치한 그랑까페의 지하살롱 앙디앙에서 뤼미에르 형제가 제작한 영화가 세계 최초로 유료 공개되는 역사적인 순간이 왔다. 모두 10초 정도의 짧은 필름조각에 불과했지만, 관객에게 준 충격은 대단했다. 특히 스크린 속에서 기차가 질주해 올 때는 진짜 기차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으로 착각한 관객들이 좌석에서 벌떡 일어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날이 영화탄생일로 정해진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첫째 오늘날 영화라고 하는 매체를 성립시킨 기본적인 장비, 즉 하드웨어가 모두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시네마토그라프는 본래 촬영과 영사를 겸한 구조였기 때문에 이날 지하살롱 앙디앙에는 필름과 촬영기와 영사기라는 영화의 세 가지 기본장비가 모두 갖춰진 셈이었다. 둘째 소프트웨어적 측면에서도 기록영화와 극영화라고 하는 2대 장르가 나란히 출현했다는 점이다. 이날 공개된 작품들은 뤼미에르 공장 공원들의 퇴근 모습을 담은 ‘공장의 출구’와 기차가 역에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리는 장면을 담은 ‘열차의 도착’등과 같이 대부분 현실 그대로를 찍은 실사(實寫)필름이었지만, 그 중엔 ‘물 뿌리는 정원사’와 같이 연출된 작품도 있었다. ‘정원사가 잔디에 물을 뿌리고 있는데 개구쟁이 소년이 몰래 다가가 호스를 밟는다. 정원사는 왜 물이 안나오는지 의아해서 호스를 들여다본다. 이때 소년이 호스에서 발을 때자 정원사는 그만 물벼락을 맞는다’ 라는 간단한 내용으로 이 작품은 있는 그대로를 찍은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감독에 의해 연출된 픽션으로서 극영화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최초의 프로그램에서 이미 기록영화와 극영화라는 영화의 2대 장르가 나란히 선을 보인 것이다. 셋째 입장료로 한사람 당 1프랑씩을 받았는데 이것은 오늘날 영화관의 시초로서 영화가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계속)
|contsmark3|필자인 최상식 pd는 1971년 kbs에 입사해, 현재 드라마제작국장에 재직중입니다. 대표작으로는 <전설의 고향> <보통 사람들> <욕망의 문> <원효대사> <삼국기> 등이 있고, ‘tv드라마작법’이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최상식 pd는 이번 연재에서 초 영상시대의 연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영상론’을 중심으로 서술한다고 밝혔습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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