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음악이야기 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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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음악이야기 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빛깔의 음색들
  • 관리자
  • 승인 2007.02.1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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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필자는 재미난 영화 두 편 <위험한 관계>와 <스캔들>을 다시금 볼 기회가 있었다.이 영화는 실은 ‘쇼데를로 드 라클로’라는 프랑스의 소설가가 1782년 프랑스 혁명 직전의 문란하고 퇴폐적인 상류사회의 인간 군상들을 다룬 서간체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이 작품은 소설 속 주인공인 발몽자작과 메르떼이유 후작부인이 위선과 가식들로 가득찬 당시 귀족들의 애정행각을 한껏 농락하며, 조롱을 일삼다가 결국에는 스스로 그 감정의 고리에 얽매여 파멸에 이르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발표 뒤 그 적나라한 묘사로 인해 한동안 악덕한 책으로 묶여있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콧대 높고 잘나신 양반들의 숨기고 싶은 사생활을 너무 들춰내면 억압받긴 매한가지인가 보다.

그러나 문화의 음지와 양지는 언젠가 뒤바뀌는 법! 그 후 이 작품은 탄탄한 구성과 심리묘사로 인해, 스탕달과 보들레르, 앙드레 지드와 같은 후세의 프랑스 문학가들에게 진가를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탁월함은 오늘날 스크린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때때로 음악 외에 더 소중한 음악성들을 화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리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 글렌 클로즈와 존 말코비치 주연의 1988년 작 <위험한 관계>와 같은 경우이다. 이들이 주고받는 상황 속 대사와 분위기들은 마치 한음 한음 놓치지 않고 잡아내 표현해내려는 대가들의 섬세한 연주를 접하는 듯해서, 또 다른 흥분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체험케 해준다.

사랑에 빠진 남녀간의 심리를 종횡무진, 어찌나 거침없이 표현해 내는지 흡사 몰아의 경지에 이른 노련한 연주자의 연주를 듣는 듯 스크린은, 순간 청중앞 무대가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만다. 말코비치와 글렌 클로즈라는 탁월한 두 주자가 뿜어내는 아우라(Aura)와 대사 속에 녹여든 자신만의 운율과 색깔들, 그리고 서서히 관객심리를 조여 오는 카리스마 넘치는 각각의 현란한 독주 앞에서 필자는 무방비상태로 빨려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연기력의 정수라고나 할까? 뛰어난 작품은 굳이 장식적일 필요가 없다고 한 말이 다시 떠오르는 순간이다. 두 배우의 주거니 받거니 하는 다소 원초적(?) 이기까지 한 감정의 이중주에 감탄하면서, 필자는 비슷한 시대 조선의 권문세도가 공간으로 이야기를 옮긴 우리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를 떠올려 본다.

같은 대상이라도 바라보는 화가에 따라서 화폭 위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질 수 있음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본인으로서는 각기 다른 화가의 개성 있는 붓질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를 갖게 된 셈이다. 화가의 그림에는 감상자 개개인이 즐길 수 있는 나름의 가치가 존재하는 법이다.

<위험한 관계>가 사랑의 격렬함과 열정 그리고 차가움과 잔인함을 마치 활이 현 위에서 떠나지 않듯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속에서 감상해 볼 수 있었다면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경우는 인상주의자들의 화풍을 보는 것처럼, 늦은 봄 날 햇볕에 부서져 내리는 듯한 찬란한 빛과 색의 조화를 내내 선사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절제된 듯 스며드는 담백한 멜로디가 더해져 함부로 대하기에는 아까운 명품 이미지들을 보는 듯 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화면의 빛과 색을 떠받치듯 조심스럽게 스멀스멀 다가오는 따사로운 음감의 세례를 받으면서 필자는 문득 이 음색이 16세기 바로크 스타일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작품 속 조선시대와 대비되는 동시대 서양 음악 풍을 따르면서도 완벽하게 화면 안 이미지에 용해되어 때때로 자신의 존재조차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음색의 존재는 흡사 영화 속 주인공인 숙부인의 순수함과도 맥이 닿아있는 듯하다.

한지 위에 서서히 스며드는 치자색 빛깔처럼 보는 이의 시선을 끌지 않으면서도 어느덧 주변의 분위기를 자신만의 것으로 수놓고 마는 섬세한 감각의 음색들-영화 <스캔들>속에 <위험한 관계>와는 또 다른 그 무엇이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오한샘PD(EBS 교양문화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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