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들, 꽃이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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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들, 꽃이 되게 하라
  • PD저널
  • 승인 2007.02.26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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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정치의 계절에

 

본지는 이번 호부터 2004년 7월 이후 중단됐던 큐칼럼을 부활합니다. 큐(Cue)는 ‘방송에서 프로그램 진행자나 연기자에게 대사, 동작, 음악 따위의 시작을 지시하는 신호’로 방송사 PD들의 일상 업무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단어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바랍니다.  <편집자주>

 

사파티스타와 멕시코 정부가 협상을 벌였다. 정부 대표는 사파티스타에게 손목의 시계를 가리켰다. 시한을 정하자는 것이었다. 사파티스타는 빈 손목을 보여주었다. “우리의 시간은 당신들의 시간과 다르다.”


사파티스타는 모든 구성원이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말하자면 직접민주주의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산악지역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견을 듣자면 그만큼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플라톤이 지적했듯이 본래 정치란 저잣거리의 누구라도 말하고 떠드는 것이다. 본래 그들이 정치의 주인공이다. 데모크라시(democracy)라는 말은 그리스어 ‘demo(국민)’와 ‘kratos(지배)’가 합쳐진 ‘demokratia’에서 나온 말이다. 즉 ‘국민의 지배’다. 그 역어인 민주주의 역시 ‘국민이 주인’이라는 뜻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배하는 것이다.


손목시계를 내보인 것이 멕시코 정부 대표가 최초는 아니었던 것 같다. ‘효율성의 유혹’은 시간의 문제에 불만을 갖도록 최면을 건다. 아마도 계산기도 함께 보여주었을 것이다. 시간은 금이다, 이 말보다 더 설득력 있는 주문은 없다. 시계와 계산기가 가져온 것은 대의민주주의이다. 대표들에게 결정권을 행사하도록 위임한다, 그 대신 그 대표들을 당신들이 뽑으면 되지 않느냐…. 보다 적은 비용으로 보다 신속하게 결정이 내려지고 집행된다. 분명 보다 효율적인 세상이 된다.


그로부터 지배자이자 주인인 국민은 지배의 대상이 된다. 정치의 주인공이 변방으로 밀려나 소외된다. 국민이 주체인 경우는 ‘우리의 대표’인 ‘그들’을 뽑을 때뿐이다. 그것도 의심스럽기 짝이 없지만.

2007년 대한민국. 정치의 계절이 또 시작되었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에는 정치의 말들이 보다 더 풍성하게 생산된다. 말의 성찬이다. 정치의 계절을 불러온 것이 내년에 있을 대선이라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정치의 계절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면 이상한 구석이 있다. 아름다운 성찬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 세 가지가 무시된다.


정치의 내용, 무시된다. 지금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 그것을 해결할 방안은 무엇인가, 그것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인가, 무시된다. 그 말을 실현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가, 무시된다. 누가 말하는가, 그가 누구인가만 선전될 뿐이다. 정치의 절차와 과정인 담론, 무시된다. 서로 주고받으며 합의에 도달하려는 것이 담론이다. 그저 소란스러운 ‘소리’만이 아우성일 뿐이다. 다른 발화자의 반응과 의견, 그냥 소음으로만 간주된다. 필요한 것은 출력이 엄청난 확성기다. 다른 소리들을 압도해 버릴 정도로.


정치의 주인공인 국민, 결정적으로 무시된다. 수많은 말들은 직업 정치인들의 입을 통해 발화된 것들이다. 국민들의 것이 아니다. 국민은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로 전락한다. 사실 듣는 자의 눈치를 보는 일도 없다. 듣는 사람이야 그저 무더기 군중으로 거기 있어주기만 하면 된다. 초기 정치의 미디어는 광장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나누는 육성이었다. 지금의 미디어는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게 효율적이다. 동시에 정치의 주인공을 변방으로 몰아 소외시킨 것이 바로 효율성의 신앙이고 그것을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파한 것이 현대 미디어다.


특히 대한민국의 미디어는 저잣거리 사람들로부터 정치를 빼앗고 마침내는 정치를 저잣거리의 불량품으로 만드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또 2007년 정치의 계절에, 뭉뚱그려져 지워진 국민들 낱낱의 이름을 미디어가 불러주길 바란다면 지나친 기대일까? 그 이름들이 꽃이 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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