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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 4시, 언론노조와 PD연합회, 기술인연합회 등 방송 현업 단체 대표들이 방송회관 19층을 방문했다. 방송위원장을 면담하기 위해서였다. 조 위원장 외에 4명의 상임위원이 동석한 자리에서 최근 방송계의 굵직굵직한 현안들이 논의되었다고 한다.

 

방송의 전면 개방을 요구하는 한미 FTA 협상, 방송통신융합, 허가추천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경인 새 방송, KBS와 EBS를 국영화하려 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공공기관 운용에 관한 법률, 지상파 계열 PP들을 또 다시 차별 규제하려는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 등이 그것이다.

1시간 반이 지난 후, 방송위원회를 나오는 대표들의 발걸음은 허탈해 보였다. ‘큰일났다’는 탄식과 함께 ‘뭔가를 기대했던 게 순진했던 것’이라는 자조의 목소리도 섞여 나왔다.

실망은 현안 문제에 대해서 방송위원들과 각 단체 대표들이 체감하는 온도차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많은 문제들에 대해 방송위원장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믿어 달라’는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회 등 관련 기관에 방송위원회의 입장을 전달하고 설명한 것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한다면 현실 인식이 그만큼 안이하다고밖에는 할 수 없다.

 

한미 FTA 협상에서 방송의 개방을 막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솔직히 고위급 협상에서 지켜질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는 한 상임위원의 고백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더욱 그렇다.

 

그는 ‘재정경제부와 외교통상부로부터 개방 목록을 내놓으라는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최선’이라는 게 그저 알리바이를 마련하기 위한 시늉이 아닌지 의심이 들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믿어 달라’고 한다 해서 믿고 넘어갈 일인가?

더 기막힌 것은 해고와 구속을 감수하면서 벌인 오랜 투쟁 끝에 얻어낸 성과인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방송 독립’을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공공기관법과 관련해 조 위원장은 ‘20년 전과 지금의 상황은 다르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방송을 좌지우지하려고 하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좀 심하게 말하면, 성군이 나타나면 태평한 세상이 오리라는 왕조 시대의 생각이다.

현대의 사회는 인치가 아니라 법치여야 한다. 사람에 따라서 좌우되지 않고, 사람이 바뀌어도 그 일관성이 유지되는 사회여야 한다.

방송민주화 투쟁의 가장 큰 요구는 방송의 독립을 담보할 수 있는 시스템, 즉 제도였다. 사람은 그 다음 문제다. 명백하게 제도를 2, 30년 전으로 후퇴시키려는 시도를, 겨우 걸음마 걷는 법치를 인치로 되돌리려는 퇴행을 단지 세월이 좋아졌다는 이유로 받아들일 일은 결코 아니다. 좋아지기는 했는가? 최고 권부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방송의 독립을 전면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것이 오늘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어쩌면 오늘의 면담은 방송위원회의 그릇된 역사 인식과 철학의 부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방송의 정치적 독립과 공공성·공익성이 3기 방송위원회가 추구하는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해서 그것이 바른 것이 되거나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사안을 무기명 비밀투표로 결정함으로써 정책결정의 투명성을 스스로 훼손하고, 방송의 독립을 위협하는 발언과 시도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한 것이 바로 3기이다.

 

‘매체 균형 발전’이라는 그럴 듯한 수사로 공공성과 공익성을 훼손하는 정책을 포장하는 것도 바로 3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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