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화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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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회관 실종 전말기
  • 승인 1999.0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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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1999년 2월 24일 오후 방송진흥원 현판식이 거행됐다. 고관대작(?)이 줄지어 목동 923-5번지로 찾아와 세리모니를 끝내고 표표히 떠나갔다. 방송진흥원측은 건물 내의 입주단체에 시루떡을 돌리며 고시레를 하기도 했다. 우리는 그 선의를 믿으며 방송진흥원의 출발을 축하하고, 나아가 이 땅의 방송문화 창달에 일정한 기여를 해주기 바란다.그런데 이미 1월 1일자로 방송진흥원이 출범했건만 굳이 이 시점에서 현판식을 올리는 뜻을 아로새겨 본다. 물론 이같은 통과의례는 우리네의 시속(時俗)이고 전통이기는 하다. 그러나 구조조정의 여파가 가라앉지도 않은 시점에서 그리고 pd연합회를 비롯한 방송 현업단체가 방송개발원과 방송회관의 ‘부적절한 만남’에 대해서 강도높은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시점에서 행사를 강행한 것에는 일말의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법적으로 없어진 사단법인 방송회관을 정리하는 차원이라고는 하지만 돌에 새겨진 이전의 방송회관 간판을 덮고 방송진흥원 이름을 드러내면서 과시적인 행사를 하는 것이 혹시라도 ‘확인사살’은 아닌가. 그렇게 하여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또다른 통합에 앞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것인가.어떻든 이제 방송회관은 건물 이름으로만 남아 있을 뿐 우리 방송계에서 사라졌다. 돌이켜 보면 방송회관의 역사는 우리 방송의 오욕과 회한을 그대로 보여준다. 방송회관의 기원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당시의 방송회관은 지금의 한국방송협회가 하는 일을 담당했다. 이 기구는 1974년 kbs가 공사로 발족하면서 간판만 남게 되었다. 법적으로만 있었을 뿐 유명무실한 채 근 20년을 그렇게 보냈다. 그 20년이 어떤 세월인가. 정통성 없는 권력이 방송의 도구적 기능에 주목해 방송을 철저히 유린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방송은 tv 수상기의 염가 대량 보급, 전면적인 칼라방송 실시라는 대가를 얻었다. 이 와중에 방송광고공사라는 기형적 기구가 등장했고 이를 통해 만들어진 막대한 공익자금은 독재 정권의 ‘당근’ 자금으로 사용됐다.그러나 방송은 일부 권언유착 언론인의 뒷마당이었을 뿐, 나팔수로 서커스단으로 동원된 만만한 상대였던 것 같다. 비록 정권의 홍보 도구로 전락했을망정 적어도 개별 방송의 프로그램만큼은 현업 방송인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럼에도 방송은 자신을 주장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방송인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순응하는 ‘도구적 기능인’이었기 때문이다.현장 방송인의 지난(至難)한 노동으로 조성된 공익자금으로 골프장을 만들고 무슨 전당을 만들고 심지어 방송을 통해 만들어진 것임이 분명한 재원으로 신문인의 요람 프레스센터를 만들 때도 방송인은 방송회관 하나 만들 엄두를 못냈다. 그러다 비로소 91년, 92년에 접어들어 방송협회가 나서 방송회관 건립을 위한 공익자금 신청을 두 차례에 걸쳐 냈으나 보기 좋게 기각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방송회관 건립이 가능했던 것은 93년 6월 ys의 여의도클럽 연설이 계기가 됐다. 그는 이 자리에서 “방송인이 모여 연구하고 토론할 장으로서의 방송회관 건립을 지원하겠다”고 생색을 냈다.그로부터 5년 뒤인 1998년에 방송회관은 준공됐다. 시초에서 완공까지 공보처 등 관리들의 입김을 배제하지 못한 채 만들어진 방송회관은 한마디로 이 땅에서 방송인이 차지하는 지위와 등가한다. 연합회를 비롯한 현업단체의 집요한 문제제기와 소위 ‘딴지걸기’가 없었으면 그 정도 형태의 방송회관도 없었을 것이다.그 방송회관이 결국 1년을 못 넘기고 방송개발원과 통합돼 사라지고 말았다. 방송 현업단체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정 들기엔 너무나 짧았던 나날이었다. 그러나 방송회관은 방송인의 정성과 단합으로 가꾸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환골탈태가 기대되는 상황이었다. 이번 통합은 사실상 방송회관을 인멸한 것이다. 이것이 과장이 아닌 것은 방송개발원에 흡수 통합된 저간의 사정과 방송회관의 사업을 형해화(形骸化)시킨 방송진흥원 정관이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다시 방송인은 자신의 노동에서 소외됐고, 관변 프로젝트나 수행한다는 방송계 일부의 따가운 시선을 받던 방송개발원은 방송회관에 입주한지 수개월만에 6백50억 짜리 사옥을 장만한 것이다.이상이 방송회관 실종 전말기다. 이는 방송인의 자존심이 어떻게 상처받아왔는지를 극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일단 방송진흥원의 반(半)은 방송회관임을 부단히 주장할 것이며 방송인의 품에 방송회관이 돌아올 때까지 투쟁할 것이다. ‘방송회관 찾기’는 이땅의 방송인이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구체적인 몸짓으로 규정돼야 한다. <본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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