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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오나라의 유명한 자객 전제의 이야기는 칼이 지닌 전혀 다른 속성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전제는 오왕 요를 즐겁게 하기 위해 칼을 놀려 천하일품의 생선 요리를 바친다. 그 생선 속에는 ‘어장’이라는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요왕은 잔치를 채 즐기기도 전에 그의 피를 뿌리고 만다.


이처럼 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잔치의 칼과 파괴의 칼이다. 참여한 사람들이 흥겹고 함께 배를 불리며 즐거워하는 것이 잔치다. 칼은 그 잔칫상을 차리는 데 요긴하다. 그러나 그 칼은 때로 흥겨운 잔치를 피 냄새로 덮어버리기도 한다.


사람의 혀도 두 가지가 있다. 잔치의 혀와 파괴의 혀이다. 날카로움으로 치자면 혀를 칼에 비할 바 아니다. 하지만 혀가 차리는 잔치의 풍성함과 혀가 베어내는 상처의 위험은 결코 칼의 그것에 못 미치지 않는다.


요즘 인구에 회자되는 말들은 불행하게도 잔치의 혀가 아니라 파괴의 혀에서 나온 말들이다. 그것도 갑남을녀가 아니라 지도자급 인사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안타깝다.


지난 23일 우리 역사가 기록하고 기억할 만한 중요한 결정이 있었다. 1975년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난 지 불과 18시간 만에 8명을 사형시켜 버린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해 법원이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했다.


하루아침에 가장을 잃어버린 유족들이 겪어야 했던 지난 32년간의 삶의 참혹함은 상상하기 쉽지 않다. ‘빨갱이 가족’으로 낙인찍혀 이리저리 유랑자처럼 떠돌아야 했다. 유족들 중 몇몇은 그 끔찍한 순간의 기억을 아예 지워버렸다. 기억을 지닌 채로는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비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은 “법원의 결정일 뿐”이라는 말로 사과 요구를 일축했다고 한다.
박 의원의 말은 두 가지 점에서 파괴의 칼날이다. 먼저 법치국가는 그 최종적인 사회적 합의를 법원의 판단에 근거해 구한다는 점에서 법의 지배를 모욕했다. ‘법’을 어떤 의도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 혹은 그 장소라는 의미의 ‘법원’으로 격하하면서 말이다. 둘째, 유족들이 부둥켜안고 살아야 했던 32년간의 깊은 상처, 상처 입은 우리 역사의 치유를 거부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신년 회견에서 방송과 관련해 한 말도 비수다. 노대통령은 방송위원회를 “정통성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불분명한 기관”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명백하게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언론민주화 운동이 이뤄낸 성과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언론민주화운동의 뿌리에는 너무나 엄혹해서 겨울공화국이라고 불렀던 제5공화국의 야만이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각성과 아무 말 하지 못했던 언론인 자신에 대한 채찍질이 있다. 통합방송법을 통해 방송의 독립성과 공공성을 명문화하고 방송위원회를 그 감독기구로서 합의제 독립행정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당시 언론인과 국민들이 요구했던 것의 최소한이었다.


대통령의 말 역시 두 가지 점에서 파괴의 칼날이다. 역사의 진보와 그 의미의 엄중함을 잊어버렸다. 동시에 민주화를 요구하며 희생을 치러냈던 국민들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러나 파괴의 칼날로 파괴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파괴되는 것에는 바로 그 자신도 포함될 것이다. 박 의원은 우리가 기대했던 섬세하고 따뜻한 이미지를 파괴하고, 법치국가의 지도자로서의 자신을 파괴한 것은 아닐까? 노대통령은 자신의 뿌리를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미래마저 공허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어떤 경우든 파괴의 칼과 파괴의 혀가 가져올 불행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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