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기 - SBS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북해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풍광에 서린 한인 강제연행자들의 한과 눈물
강창식 - 한국비젼 대표

|contsmark0|내가 북해도에 가게 된 것은 삿포로에 살고 있는 친구 때문이었다. 친구는 지금 삿포로에 살고 있다. 유난히 학구적인 그는 북해도에 관한 일반적인 지식을 내게 알려주었다. 눈의 고장 ‘북해도’는 겨울이 북해도답다.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는 특히 가난한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 ‘가난’이란 표현도 사치스러운 한인 강제연행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가깝게 보려 한다면 겨울에 북해도를 가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북해도의 풍광은 감정이 무딘 사람이라도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이 수려한 풍치속에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들의 한과 눈물이 스며있다. 북해도는 아직도 북방영토의 탈환을 외치고 있는 일인들의 마지막 요새같은 땅이다. 그래서 일본열도에서 인구밀도는 가장 낮지만 도로, 댐, 비행장 등 기간시설이 산재해 있다. 특히 북해도 탄광은 한 때 일본에서 두 번째로 생산량이 많았던 만큼 수많은 인부들이 혹사당한 곳으로 유명하다.한 세기를 정리고 미래 비전을 제시한다는 기획의도의 말장난은 전혀 장난스럽지 않은 추위와 허벅지까지 빠져드는 눈 속에서 여지없이 깨지기 시작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머리 속에 채워놓았던 구성내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한다. 프로그램에 규칙같은 것은 없다고. 남한 땅의 90%나 되는 넓은 땅을 한번 헤집고 다녀볼 작정으로 길을 떠났다. 선조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나눠본다는 생각에 앞서 역사의 현장을 밟아본다는 것만 해도 의의가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안내를 맡은 분이나 현지 운전기사 등-은 우리의 미친 짓에 찬사와 함께 잘못 걸렸구나 하는 후회의 빛도 숨기지 않았다.사람들은 타인에게 부당한 모욕이나 학대를 받았을 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가해자측에 어떤 식으로라도 맺힌 한을 풀기 위해 애쓰거나 복수의 칼을 벼리는 유형이 있고, 또 하나는 불행한 과거를 빨리 잊고 현실에 적응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튼 북해도에서 만난 한인들은 강제연행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또 하나 징용이나 징병문제에 관한 전문지식을 갖춘 사람이 드물었다. 살아남기 위해 생업에 충실하다 보면 과거사를 파헤치는 데 시간과 정력을 소비할 틈이 없었을 터이다. 하지만 우리의 불행한 역사를 찾아 나서는데 일본인 연구가를 앞세우는 게 여간 씁쓸하지 않았다.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일본인 연구가들은 적극적이었고 상대적으로 주변의 미온적인 한인들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북해도에서 우리 선조들의 불행한 역사를 포함해 한인들을 취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억지로라도 한인들에게 애정을 갖지 않으면 프로그램은 뿌리 채 흔들릴 판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어줍잖은 잣대로 재지 말자.’ 애써 정리하고는 여정을 재촉했다.
|contsmark1|아직도 생생한 기억 몇토막.- 시베챠 지역에 있는 케네베츠 공항 터, 우리 일행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던 마쓰모토 선생을 모시고 한인 노역현장을 살펴본다. 마쓰모토 선생은 취재중 한인, 일본인 통틀어 가장 인상에 남는 사람이다. 일흔 셋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 넓은 비행장 터를 흡사 신들린 사람처럼 질주한다. 도무지 제어불능이다. 사태를 파악한 촬영감독이 무거운 장비를 들고 함께 뛰다 눈밭에 카메라를 싸안은 채 나동그라진다. 이런 장면은 상당히 거칠게 느껴지지만 편집 작업 때 삽입시켰다.- 현재도 댐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는 슈마리나이 댐. 일본열도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라 장갑을 끼고도 손이 곱아서 애를 먹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진입로까지 막혀 일행들이 낙담하기 시작할 때다. 촬영감독과 둘이서 발전소 직원들에게 손짓 발짓 다해가며 읍소했다. 우리 정성을 갸륵하게 본 것일까? 이들은 제설차를 동원해 진입로를 만들어 주었다. - 마쓰모토 선생이 소장하고 있는 책과 한인 관련자료를 찾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손수 담근 김치가 있는 순한국식 식탁으로 우리를 감격케 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다운 그의 모습을 보며 착잡한 상념에 젖었다.
|contsmark2|방송은 나갔다. 나는 오래전부터 편집만큼은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왔지만 편집의 눈속임이 무슨 대수인가? 구성안까지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나는 젊은 후배들에게 감히 말한다. 머리가 나쁘면 몸으로라도 때우라고. 몸소 체험하면서 발로 뛴 것에는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다. 프로그램의 완성도가 떨어졌다면 그건 순전히 더 뛰지 않았던 탓이다. 졸작을 그나마 봐 준 선후배, 시청자들게 미안하다.
|contsmark3||contsmark4|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