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론]근대 한국의 미망-‘방송 80년’ 역사에 던지는 화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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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평  호 단국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근대 한국이 겪은 가장 큰 역사적 경험의 요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일제 식민지라는 역사의 비극적 왜곡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18세기 이래 지구적 범위에서 진행된 서양의 제국주의적 팽창이라는 정치경제적 변동이 자리하고 있다. 1945년 해방을 맞기까지 20세기 전반기에 한국·한국인이 겪은 시련의 일제 강점기는 이러한 제국주의의 최악의 유탄이다.


한편 제국주의의 침탈은 나라별로, 또는 지역별로 그 강도나 비중에서 차이는 있지만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가 겪은 공통의 쓰라린 경험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역설적인 것은 서구, 또는 서구 아류의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들이 종주국을 국가발전의 모델로 삼아 산업적 근대화의 길, 즉 서구화로 나섰다는 점이다. 


근대의 경험이 식민지로부터 시작된다는 역사에 대한 절망과 좌절, 분노와 통한은 집단적인 민족의 상처, 경험과 기억으로 자리잡게 되고, 이는 당연히 식민지 역사의 극복을 위한 개인적·집단적 노력과 투쟁으로 이어진다. 당시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무엇을 목표로, 무엇을 가지고-사상적 지도노선이든, 물리적 수단의 차원이든-, 어떻게 노력하고 투쟁하여 이 역사를 넘어설 것인가라는 물음이었다. 


유교적 전통·왕조체제는 그러한 물음에 답이 될 수 없었다. 식민지를 겪고 있는 나라의 인민들로서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민족주의·민족이 그 답으로 자연스럽게 등장하였다.

 

근대의 문을 주체적으로 여는데 실패한, 그리하여 민족 전체의 비극을 초래한 원인으로서 과거의 모든 것들은 타기·배척·포기·극복의 대상이었을 뿐, 그것이 새로운 목표, 새로운 수단, 새로운 사상을 제공하는 토대가 될 수는 없었고 사실 그러한 역량도 없었다. 600여년이라는 긴 시간을 이어온 왕조체제를 근대 여명기의 한국사회·한국인이 그토록 쉽게 내버렸던 드라마틱한 결단의 배경은 이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근세 초입에 한국민의 집단적 패배를 초래한 힘, 물리적 현실의 공간에서 한민족이 목도한 강력한 제국주의의 힘, 다시 말하면 한반도를 초토화한 승자가 소유한 가장 직접적 형태의 힘은 서양의 기계·기술이었다.

 

근대적 체제로서의 기계·기술은 이전에 한국사회가 가져보지 못했던 새로운 존재였다. 그 존재는 한 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좌절시킨 것이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 힘에 대한 강한 열망을 낳게 하였다. 다시 말하면 서양의 기계·기술이라는 물리적 힘에 패배한 민족이 이제 그 물리적 힘을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하는 역설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역사경영의 주체가 아니라 패배자·피해자의 입장으로 근대의 무대에 올라섰다는 것, 그리고 근대의 패배·피해를 넘어서기 위한 이념적·물리적 토대를 가해자, 또는 그 배후의 가해자들에게서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는 점, 그리고 식민지 부역의 역사를 청산치 못했다는 점 등은 한국 근대의 피폐한 풍경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여기에서 형성된 근대 한국의 고통스러운 미망은 지금 이 시점에도 계속된다. 스스로 근대의 역사를 열지 못했다는 집단적 패배의 기억과 상처는 이후 우리 민족을 두고두고 괴롭히는 열등 콤플렉스, 또는 우승열패의 신화로 작용하고 있다.


천형과도 같지만 그러나 껴안아야하는 우리의 전통과 역사를 피해서 우리는 너무 멀리 달아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힘의 상징인 기계/기술에 심취하면서 우리는 너무 빨리, 무비판적으로, 전면적으로 그것이 가져다주는 편의와 경제적 가치에만 몰입하고 있다. 제국의 힘을 학습·복사·전이하여 제국을 닮고자했던, 지금 이 시점까지 이어지는 그 역설적인 선택에 대해 우리는 반성해 보고 있는가?


80년이든 60년이든 근대를 상징하는 문화·기술체제인 방송의 긴 역사에서 한 번쯤은 이렇게 큰 화두를 잡고 생각을 이어가보는 노력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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