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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영 KBS PD (스페셜팀)

 

운동이 낙이 된 지 오랩니다.


인류가 이토록 잔머리를 굴리며 살아야 했던 때가 있었을까요? 복잡해질수록 우등한 것이 되고 사소한 상품에도 고도의 노동력과 기술을 집약해 넣어야 살아남는 시대, 없던 욕망을 창작해내고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을 재능이라고 부르는 시대. 잔머리를 안 굴리면 일이 안 됩니다. 하여 운동이라도 해야 합니다. 머리가 복잡하면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몸이 움직여야 머리가 쉽니다.


주말마다 수영을 하러 갑니다. 언제부턴가 장거리 수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돌면 최소 열 바퀴 이상, 탄력 받으면 수 십 분을 빙빙 돕니다. 호흡이 먼저입니다. 자세나 속도는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일단 호흡이 규칙적이고 편안하게 되어야 합니다. 호흡이 안정되면 팔이 저절로 따라옵니다. 팔이 안정되면 다리가 저절로 따라옵니다.

 

다리가 안정되면 온 몸이 저절로 따라옵니다. 얼마 있으면 호흡도 사라지고 팔도 사라지고 다리도 사라지고 몸도 사라집니다. 리듬, 리듬만이 남습니다. 만약 팔이 사라지지 않으면 어깨가 아프고, 다리가 사라지지 않으면 허리가 아프고, 호흡이 사라지지 않으면 목이 뻐근합니다.


푸어, 쉬이, 푸어, 쉬이, 어머니 뱃속에서나 들었을 법한 멍멍한 소리, 물 속에서 공기가 지나가는 소리만 남습니다. 아, 내가 쉬는구나 싶습니다. 그런 날은 오래 수영해도 지치지 않습니다. 마치 한잠 잘 자고 난 것처럼 상쾌합니다. 이 모든 것이 호흡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물밖에 있으면 너무나 자명한 일이어서 의식조차 할 수 없는 호흡이 물속에서는 선명한 빗금을 그으며 지나갑니다. 그렇다면 뭍에 올라와서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호흡을 안정시키면 저절로 아이디어가 흘러나오고 저절로 촬영도 잘 풀리고 저절로 편집도 잘 될 수 있을까요? 그건 욕심이라 치고, 하루를 보내고 나면 목, 어깨, 허리가 뻐근하고 편두통이 오는 상황은 모면할 수 있을까요? 일상의 순간순간에서 호흡을 의식하는 것. 남쪽의 더운 나라 승려들이 수련하는 방법입니다.


손을 뻗습니다. 키보드를 두드립니다. 메일을 엽니다. 하아! 파도가 밀려옵니다. 이번 놈은 꽤 높은 파도입니다. 그 뒤로 또 다른 파도들이 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언제 어떻게 닥쳐올지 모르는 놈들입니다. 노트북을 여는 순간, 고해(苦海)입니다. 풍랑에 휘말립니다. 전화벨은 울리고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고 사방팔방에 무수한 포스트잇이, 죽은 나무에 매달아 놓은 소원처럼 대롱거리고 있습니다.


눈을 감습니다. 또 다시 장거리수영이 시작되려고 합니다. 아직은 자세나 속도를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호흡, 호흡이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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