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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를 그리며

|contsmark0|소설가 이병주는 인간의 풍부한 상상력이 신화를 낳았다는 말을 부정한 적이 있다. 오히려 상상력의 빈곤이 신화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요절한 천재에 대해 만들어진 신화가 대표적인데 사람들은 일찍 세상을 떠난 이에 대한 동정심에서 그가 살아 생전에 남긴 흔적만으로 상상력을 제한적으로 동원해 신화를 주조한다는 것이다. 즉 그가 계속 이승을 살았다면 현실에 굴복하고 타락할 수도 있는 법이지만 우리의 상상력은 드러나 있는 것을 토대로 작동할 뿐이다. 완성품이지는 않았으되 영롱히 빛나던 창조성, 거칠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변을 압도했던 개성… 우리는 상실했기에 더욱 아쉬운 그들의 천재성을 상찬하며 살아남았음을 안도한다. 무릇 요절한 천재에 대한 신화에는 다분히 이런 심리가 숨어 있다.올 3월로 10주기를 맞은 시인 기형도의 신화는 어떨까. “살아있을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일부 비평가에 의해서만 내면적이고 비의적이며 우화적인 독특한 색채의 시인으로 평가받던” 것을 안타까워 하던 지인들에 의해 <기형도 전집>이 최근 나왔다. 그들은 말한다. “만 29세 생일을 엿새 앞두고 숨진 뒤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이 출간되었을 때 그에 대한 평가는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며, 이후 한국 시의 새로운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 이제 그의 작품들은 하나의 새로운 고전으로 우리 문단에 자리잡게 되었다….” (기형도 전집 중에서) 그의 문학세계에 대한 평가 중의 가장 극치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말일 것이다. “기형도, 그토록 치명적이고 불길한 매혹, 혹은 질병의 이름”. 잘은 모르지만 이 정도면 기형도 신화는 이미 요절한 시인에 대한 의례를 넘어서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필자에게 감히 기형도의 문학세계를 재단할 능력이나 자격은 없다. 다만 그와는 동년배이고 그가 80년대 중반 일간지의 방송 담당기자로 일할 때 접해본 적이 있어 어쩐지 그와는 낯설지 않다는 친근감이 있다. 짙은 눈썹 너머로 형형히 빛나는 그리고 어쩐지 우수에 젖은 듯한 그의 눈빛이 문득 되살아난다.그를 안 것은 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자로서가 먼저였다. 그는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로 시작되는 그의 시 ‘안개’를 보며 억압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익명의 도회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 상실에 대한 문명비판적 메시지를 처절하게 그려낸 귀기어린 에스프리를 느꼈다. 그것은 한때 ‘문청’ 시절을 거친 필자에게 장엄한 교향곡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그것은 그가 의도하지 않았음에 틀림없지만 때만 되면 주택복권 뽑는 심정으로 신춘문예를 기웃거리던 필자에게 관념 속의 문학을 포기하고 주제파악 하라는 준열한 통첩에 다름 아니었다.“일상 속에 내재하는 공포의 심리적 구조를 추억의 형식을 통해 독특하게 보여준다는” 그의 웅숭깊은 시적 내면을 여기서 모두 톺아볼 수는 없다. 다만 그가 방송 담당기자로 방송사에 왔을 때 처음에는 ‘물 좋다는’ 정치부를 버리고 왔다는 데서 세속적인 호기심이 동했고 나중에는 그가 다름아닌 시인 기형도임을 알고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시인이 쓰는 방송 관련 기사는 어떠했는가. 문단에서 그의 10주기를 기리는 것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오늘은 그를 한 사람의 방송 담당기자로서 회상하고 싶다. 한마디로 그의 기사에도 시인이 살아 있었다. 그의 기사는 어찌 보면 한 편의 정치(精緻)한 문학비평과도 같았다. 제작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의미까지 발견해내 이를 그 적확하고도 수려한 언어로 묘출하는 것이었다. 당시 mbc에서 문학 다큐멘타리로 <한국명작의 무대>를 제작하면서 그 첫편으로 해금된 시인 정지용에 관한 프로그램을 방송한 일이 있다. 이때 그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 매체인 tv에서 정지용을 다룸으로써 그를 온전히 복원시켰다고 평을 했다. 이는 tv의 실상에 대한 성찰과 문학적 통찰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분석이라 생각한다. 그는 또 <명곡의 고향, 리스트> 편을 두고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프란츠 리스트의 오른손 브론즈 클로즈업 커트를 주목한 리뷰 기사를 쓴 적도 있는데 이쯤되면 탁월한 영상비평가의 수준이라 할 만하다. 기형도는 10년전 이맘 때 파고다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됨으로써 우리 곁을 떠났다. 그 요절의 삶이 우리에게 신화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 신화가 비록 제한된 상상력의 소산물이라 할지라도 어쩐지 싫지 않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또 한 사람의 천재를 가질 수 있다면. 우리 방송계도 그의 신화를 기리고 기억해야 한다. 그가 떠난 지금 우리 주변에는 경박한 인상비평이나 독선적인 매체패권주의로 방송을 기만하는 일부 신문의 부도덕과 거오(倨傲)가 더욱 기승을 떨치고 있다. 그럴수록 그가 그립다.(이 글을 위해서 그의 전집을 뒤졌으나 기자 시절 썼던 기사는 제외돼 있었다. ‘기사는 특정 신문사에 소속된 직업인으로 목적을 갖고 씌어졌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아니 목적없는 글이 어디 있는가. 아마도 그의 기사가 갖는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이리라. 그의 방송 관련 기사만을 따로 모아 별책본이라도 만들어야 할 판이다.) <본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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