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스님을 추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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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스님을 추모함
  • 김기슭 SBS PD
  • 승인 2007.03.28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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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슭  (SBS PD)

 

24년 만의 귀향, 대구 보안부대로 개처럼 끌려간 지 24년만의 귀향, 우리는 스님의 귀향을 따라 나셨고, 스님은 끝내 아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 후 사흘간 술로만 지냈다고 했다. 아들도 사흘간 연락이 끊긴 채 술로만 지냈다.

 

방송이 나가고 한 주가 지나고 스님은 한 걸음에 서울에 오셨다. ‘진실화해위’에서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조사 들어갈 테니 자료와 문서를 다 갖고 오라고 했다며. 인혁당 재심판결 소식도 들었다 했다. 스님의 표정은 그렇게 희망에 벅차 있었다. 그리고 자식들을 다시 찾아갈 거라 했다. 모든 누명을 벗고 스님도 간첩도 아닌 그냥 아버지로 다시 가겠노라고...


그리고 2주 후, 갑자기 돌아가셨다. 한 손에는 전화기를 든 채로. 마지막 순간 어디로 전화를 하시고 싶었던 것일까? 돌아가실 때 스님은 혼자셨다. 고아원과 양로원을 짓겠다며 주지 자리를 박차고 나와 청원 무중골 한 농가에 기거하고 계셨다. 함께 고문 받은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동생과 남은 자식에게 지은 죄,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아이들과 노인들을 돌보겠노라 했다.

 

하지만 그 일도 모두 미룬 채 재조사며 재심청구에 동분서주 하시다 갑작스레 세상을 뜨셨다. 스님 마지막 가시는 길, 그토록 그리던 아들이 왔다. 상복을 입고 내내 스님 곁을 지켰다. 그 누구도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소년 가장, 납북어부, 대우조선 하청 그러다 간첩, 그리고 승려, 스님의 이력이다. 잔인한 고문에 자식들을 입양 보낸다는 협박에 스님은 끝내 거짓 간첩자백을 했다고 했다. 검사는 86, 88 국가적 대사를 앞두고 불순분자를 격리수용해야 한다고 떠들었다. 판사는 국가보안법 위반 간첩죄 7년, 이미 실형을 받았던 10년 전 납북사실로 다시 반공법 위반 7년, 예비군 훈련 불성실  향군법 위반 3년, 도합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16년 남짓 형을 마치고 곧바로 절로 들어가셨다. 그 동안 가족들은 호적을 파 달라고 했다. 간첩의 아내, 간첩의 자식으로 사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다며.


돌아가실 때, 스님은 여전히 보안관찰 대상자였고, 고아원 양로원은 삽도 뜨지 못했고, 간첩 누명은 여전히 벗지 못한 상태였고, 자식과는 여전히 풀지 못한 한을 가진 채였다. 스님의 갑작스런 죽음이 더 안타까웠던 것은 그 모든 것에 대한 희망이 싹트고 있을 때여서 일 것이다.

 

지난 수요일 납골이 모셔져 있는 마산을 다녀왔다. 남쪽은 벌써 개나리가 활짝 펴 있었다. 2년 전 결혼식을 그저 먼발치서 지켜보기만 하고 돌아 왔다는 딸, 스님은 지금 그 딸 곁에 자리 잡고 계셨다. 황량한 공원묘지 납골묘 한 비석엔, 경주이씨 이상철(보광)이란 이름과 함께 부인과 아들과 딸과 사위와 외손주의 이름이 함께 새겨져 있다. 죽어 그토록 바라던 가족과 화해를 하셨으니, 이승을 떠나는 길 더 이상 외롭진 않으실 게다. 늦은 것일까, 그나마 늦지 않은 것일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윤동주 詩 <무서운 시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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