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월드와이드]인터넷 시대는 공공성 상실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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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변화와 함께 의사소통 기술도 진보하고, 이에 따라 미디어의 역할도 함께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미디어가 미디어로 존재하는 한 변화하는 부분과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변화한 것은 굳이 말하면 ‘공공성’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기능부전(機能不全)에 빠진 매스미디어를 진실한 저널리즘으로 각성하고 재생시키는 일은 본연의 ‘공공성’을 재인식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가네히라 시게노리(金平茂紀) TBS-TV 보도국장의 주장이다. 신조사정보 2007년 3/4월호의 기사를 소개한다.

 

맥루한의 ‘세계는 하나’ 인터넷으로 이뤄질까


요즘 ‘인터넷 시대의 저널리즘’이라는 주제로 토론의 기회가 많아졌다. 필자는 심할 정도로 아날로그적인 인간이지만, 개인용 컴퓨터를 사용하고 미숙하기는 하지만 이메일과 블로그도 이용하고 있다. 또한 당연한 일이지만 이 원고 역시 컴퓨터로 작성하고 있다. 그러나 가끔 이러한 일들이 우습게 여겨진다. 현장에서 취재를 하는 편이 훨씬 더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토론장에서 필자는 ‘인터넷 저널리즘이 기존의 매스미디어를 대신 할 시대가 도래했다’ ‘시민 저널리즘이 부패한 기성 미디어를 능가한다’ 등의 발언을 수차례 들었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씁쓸해 하며 이런 식으로 말했다.


“인터넷이냐, 기성 매스미디어냐, 이러한 질문 설정 방식은 잘못된 것이다. 인터넷이 기성 미디어를 대신할 것이라는 발상도 잘못된 것은 아닌가. 최소한 현재 저널리즘이라는 문맥에서 인터넷의 가능성이 이 정도로 커질 수 있었던 것은 기성 미디어가 본래 해야만 하는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 즉 저널리즘의 ‘기능부전’이 ‘미디어 불신’으로 이어지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기성 미디어를 각성, 재생시키는 일이지, 그저 쉽게 기성 미디어의 ‘임종’을 주창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솔직히 필자는 인터넷 만능 신봉자에 대해 보통 사람 이상의 회의감을 갖고 있다. 필자는 변화에 즉시 반응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런데 과거 역사를 돌아보면, 인터넷 가능론과 유사한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텔레비전이 세상에 보급되기 시작한 1960년대에 캐나다의 미디어 학자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이 주장한 낙관론인 ‘글로벌 비전(Global Vision)’이다.


맥루한의 주장을 알기 쉽게 말하자면, TV의 등장으로 세계는 하나가 되어 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텔레비전은 그 명칭처럼 원격지(tele)의 영상(vision)과 음성정보를 동시에 다수가 볼 수 있게 한 기술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은 TV로 국경과 체제,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어 하나로 연결된다. 글로벌 비전을 가진 세계는 평화롭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는 TV에 ‘희망’을 가져도 좋을 시대였다.


세계 곳곳에서 TV 방송이 시작된 지 반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 우리는 맥루한의 이상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를 알고 있다. TV는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전쟁을 멈추게 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인터넷의 보급으로 ‘디지털 맥루한’의 주장이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인터넷의 보급은 확실히 인간의 의사소통을 본질부터 변화시킨 측면이 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으로 성서가 일반 대중에게 널리 보급되고, 기독교 교회의 사회적 위치에 큰 변동이 발생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무선기술과 전화, 라디오, TV의 등장도 사회의 의사소통 방법을 변화시킨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인터넷이 변질시킨 인간관계


개인용 컴퓨터나 휴대전화가 현재와 같이 보급되면서 의사소통의 한 측면, 스타일이나 언어 사용법 등이 상당 부분 변화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의 중요성, 밀도 같은 것이 요 몇 년 사이에 굉장히 많이 변화했다. 휴대전화가 어느 정도로 의사소통 방식, 더 나아가 인간관계를 변화시켰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지금부터 20여 년 전의 TV 드라마는 이러한 설정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자 일대 결심을 한 남자가 여자 집으로 전화를 건다. 그 당시에는 가정에 가족 모두가 사용하는 다이얼 방식의 전화기가 한 대 있을 뿐이다.


그 전화기는 현관 근처의 거실에 레이스 달린 덮개를 쓰고 외부 세계와의 창구(window)가 되어 주었다. 한편 남자의 전화를 받은 사람은 막 귀가한 여자의 아버지였다.
“저, 교코(響子)씨 있나요?”
“나는 마노(眞野)라고 하는데, 자네는 누구인가?”
“저는 교코씨 친구인 도모노(友野)라고 합니다만”
“알겠소만, 내 딸에게 대체 무슨 볼일인지?”
“(당황)”


이제는 고등학생도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물론 전화요금은 부모님이 내주심), 이런 장면은 더 이상 드라마에 등장하지 않는다. 불시에라도 당사자와 직접 대화가 가능하다. 아니, 직접 대화 이전에 이메일이 있다. 편지지를 대신해 휴대전화로 메일을 쓴다. 옛날과 비교해보면 마치 기적과 같다. 그러나 이런 것에는 멋도, 여유도 없다.


이러한 의사소통 방법을 어려서부터 몸에 익혀 온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지금 아저씨, 아줌마뻘인 사회의 선배들로부터 “대면형(對面型) 의사소통 능력이 명백히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아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사회적으로도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 ひきこもり.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안에만 틀어 박혀 사는 병적인 사람)를 ‘개실형(開室型)’ 의사소통 방식이 지지해 준 것도 사실이다. 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그들은 사람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을 귀찮고 번거롭게 여긴다. 말이 주제를 많이 벗어난 것 같으니, 다시 ‘디지털 맥루한’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인터넷 장사로 급성장한 신흥 IT 기업이 기성 매스미디어 기업에서 빼앗아 온 것을 두고, ‘인터넷이 신문, TV를 죽인다’라며 떠들썩하기도 하다. 이것을 필요 이상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식자도 있다.


이 ‘시대의 총아’는 공공 공간으로서의 매스미디어의 성격에 반하여 비정상적으로 순진한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굳이 기성 매스미디어를 통하지 않아도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뉴스의 가치는 미디어가 정하지 않고, 액세스(access. 히트 수) 횟수가 정보 가치를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히트 수에 따라 자동으로 결정된다. 어떤 IT 기업 경영자는 ‘공공성(公共性)이 오르면(기사에 대한 액세스 수가 많아지면) 수익성이 오른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천박한 인식인가.


이러한 시대이기 때문에 인터넷이 기성 매스미디어의 대체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순식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인터넷 신봉자들은 “인터넷이라고 하는 대용량 전송로가 개방되어, 기성 미디어가 중시하는 신문 판로, 주파수를 할당할 수 있는 전파라는 독점적인 전송로는 이제는 수많은 선택 중의 하나가 되었다. 게다가 인터넷을 통한 전송로는 쌍방향성을 갖기 때문에 기존 매스미디어와 같은 기사를 그저 떠넘기기만 하는 식은 이루어 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정보혁명이 도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제의 핵심은 기성 미디어의 기능부전


필자는 쌍방향성을 무조건 희소식으로 여겨야 하는지가 의문이다. 또한 방송사업의 면허 할당제에 있어서 전파의 독점은 곧 악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의문이다. 방송 사업이 성립하게 된 역사적인 경위를 경시하는 태도, 공공부문의 민영화를 모두 옳다고 보는 이데올로기 등에도 의구심이 든다.


몇 번이나 강조하지만, 문제는 현재의 매스미디어가 ‘공공성’과 괴리되어 ‘기능부전’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기성 미디어로부터 전달받은 정보가 극히 빈약하여 현재의 미디어는 유치화(幼稚化), 단순화(單純化), 균일화(均一化)되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들의 상상력이 열화(劣化)하는 것은 아닌가 등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말을 빌리자면, ‘내재적’ ‘초월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기성 미디어와 관련된 사람들이 스스로 처한 ‘부조리한 현실’로 눈을 돌려 그것을 치유하고 자신들의 미디어를 재구축해 가는 것, 각성-재생의 과정을 스스로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필자는 단지 입으로 떠들어 대는 것은 극히 간단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험난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개인 돈벌이 수단은 안된다


모든 이를 위한 것들은 개인의 돈벌이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사회를 형성하는 것은 사회적인 의사소통을 꾀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이와 공유해야 하는 공공 정보라는 것이 있다. 선거의 후보자는 어떤 인물인지, 각 정당의 주장이 어떻게 다르며 서로 어떤 방식으로 대립하고 있는지, 물가는 높은지 낮은지, 현재 사회복지 수준은 어떠한지, 사람들의 생활이 어떠한 문제를 안고 있는지, 연금은 어떠한지, 교육 현장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일본 밖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세계는 일본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세금구조를 어떻게 개혁하려고 하는지 등 종류가 다양하다.


사람들이 논의해야만 하는 의제 설정은 매스미디어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이다. 공공의 정보는 미디어를 통하여 얻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구조이다. 공공 공간은 매스미디어가 존재하는 확고한 이유이다.


20년 동안 미국 사회를 이끌고 있는 네오 리버럴리즘(Neo-liberalism)이 일본사회를 장악했다. 공공성을 해체하면 어떤 비극이 일어날 것인가는 현재의 미국 사회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좋은 예가 미국 항공업계 상황일 것이다. 유럽에는 공공의 것에 대해 사회 전반에 걸쳐 지속되어 온 오랜 신념이 있다. 그것은 모든 이를 위한 것은 개인의 돈벌이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의사소통 기술도 진보하고, 이에 따라 미디어의 역할도 함께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미디어가 미디어로 존재하는 한 변화하는 부분과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변화한 것은 굳이 말하면 앞서까지 사용했던 ‘공공성’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기능부전에 빠진 매스미디어에 진실한 저널리즘으로 각성-재생시키는 일은 본연의 ‘공공성’을 재인식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말하기만 하는 것은 오히려 허무함을 줄 뿐이다. 조금이라도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해야만 한다.

 

수치화라는 신앙에서 벗어나라


인터넷 신봉자의 주장 중 일부는 비즈니스 논리에 기반을 둔다. 다시 말하면 돈벌이에 치중한다는 것이다. 기업이 돈벌이를 목표로 하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나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저널리즘 세계는 이윤 추구 논리와는 다른 차원에서 성립한다. 저널리즘 활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경제적 기반이 중시되지만, 돈벌이를 저널리즘 활동의 첫째 목적으로 삼는 것은 비뚤어진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저널리즘의 본래 목적은 결코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양질의 인터넷 저널리즘을 위해 고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비즈니스 논리를 저널리즘의 근본이라는 생각을 갖고 활동하는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강한 의지를 갖고 매스미디어가 잃어버린 것을 제시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필자도 놀라움에 말을 잃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스스로도 인터넷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이런 이유 때문에 필자도 이메일을 사용하고 블로그 운영을 시도하는 것이다.


‘수치(數値)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 양질의 인터넷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사람들로부터 흔히 듣게 되는 말이다. 기성 매스미디어에서 시작된 저널리즘이지만, 부수나 시청률을 지나치게 추구하면 미디어의 본분을 잊게 됨을 말한다.


잠재적 상품 구매 능력을 우선시하여 도출해 낸 ‘시청자=소비자’론을 주축으로 하는 마케팅 이론을 저널리즘에 직접 적용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뉴스 정보 선택을 앞서 말한 편협한 마케팅 이론과 연결지어 봐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대선배의 절망을 바라보면서


일본 TV 업계에서 필자가 경애하는 대선배 중 한 분인 무라키 요시히코(村木良彦)씨가 최근 어느 잡지에 글을 썼다. 2006년 4월부터 블로그를 시작했다는 무라키씨의 글 제목은 ‘사람들이 자신의 미디어를 갖기 시작했다’이다. 거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기록된 것에 필자는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저널리즘의 기원이 로마에 잠복한 노예가 변경의 귀족에게 정보를 보고한 것에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미디어의 역사는 ‘권력의 대리인’이라는 궤적을 그린다. 근대에 와서 사회적 책임이라는 공익성 개념이 그 특권적 위치와 광고수입을 지키기 위해 원용되어 왔다.”
TV 업계를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 나온 이러한 말에, 필자는 기성 미디어를 향한 대선배의 ‘절망’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지만, “하지만 그래도...”라는 말이 혀끝을 맴도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편역 : 나인선(한국언론재단 정보사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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