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윤 KBS PD의 6월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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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사람도 있는데, 직장이 대수냐는 심정이었죠” 

3일간 무단결근 명동성당에서 농성…“자본주의 폐해 극복 방안은 노동운동뿐”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뜨거운 함성이 서울 명동의 하늘을 가득 채웠던 1987년 6월. 학생 900여명과 시민 200여명은 명동성당에서 10일부터 농성에 들어갔다.  

당시 시민 농성단에는 방송사 PD 한명이 포함돼 있었다. 학생들과 함께 시위 대열에 참여해 독재타도를 목 놓아 외쳤던 20년전 ‘그때 그 사람’은 바로 현상윤(52) KBS PD였다.

당시 입사 3년차였던 현 PD는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해 농성단에 합류했다”고 말했다.

“나는 대학 때 데모 한번 안했다. 노느라 대학을 제대로 졸업도 못했다. 그런데 물고문으로 죽은 박종철 충격이 컸다. 누구는 죽기까지 하는데 그깟 직장이 대수냐하는 심정으로 농성장에 들어갔다.”

현 PD는 그날 태어나서 처음 최루탄을 원 없이 마셔봤다. 돌멩이도 던져봤다. 여학생들과 돌도 날랐다. 시민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부끄러움이 밀려와 고개를 들기가 어려웠다.
“죄송합니다. 관제 방송에서 녹을 먹고 있습니다.”

현 PD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췄다. 당시 KBS는 ‘독재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하고 있었다. “KBS PD가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인다”는 소식은 11일 곧바로 KBS에 보고됐다.

무단결근 3일째 되는 날, 성당 마당에 앉아 있는 현 PD의 등을 누군가 툭 쳤다. “상윤아, 엄마 여기와 계시다, 나가자!” 수녀인 사촌누나였다. 장손이 걱정돼 성당 근처에서 애태우다 수녀인 사촌누나를 앞세워 자신을 데리러 온 어머니를 외면할 수 없었던 현 PD는 그날 밖으로 나왔다. 회사로 돌아간 뒤 현 PD는 사실상 해고 수순을 밟고 있었다. 그러나 6.29 선언이 터지면서 해고는 면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사람 노릇’했다는 뿌듯함을 느낀다. 그 이후 나는 개인적으로 C급 PD, 회사에선 ‘위험한 놈’으로 낙인이 찍힌 채 살았지만 자부심을 갖고 있다.”

6월 항쟁의 뜨거운 열망은 같은 해 7월 20일 KBS PD협회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현 PD는 그 뒤 결성된 KBS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3년간의 회사 생활중 11년이상 노조 전임을 맡았다.

“나는 원래 양순한 사람이다. 조용히 살고 싶었다. PD로서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90년 4월 방송민주화투쟁이후 나는 소총부대로 전선에서 맹렬히 활약했다.”

‘KBS 4월 투쟁’이라 불리는 90년 4월 사건은 현 PD를 급진적인(?) 투사로 변모시켰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움직이는 시한폭탄’. 하지만 현 PD에게 후회는 없다.
“당시는 관제방송이었다. 선거철만 되면 영락없이 간첩사건이 터지고 억울한 사람들이 잡혀가던 시대였다.”

87년 6월 항쟁 이후 스무해가 지난 지금, 그는 과거를 돌아보며 쓴 웃음을 짓는다.
“87년에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희망이 없다. 20년전 군부독재에 대항해 성과를 거뒀음에도 주도권은 여전히 기득권에 있다. 자본권력이 기득권을 누리고 있으며 경쟁 만능주의가 판치고 있다. 이에 대한 저항의 동력도 소진됐다. 공동선의 가치가 외면받고 있다. 때론 비애감을 느낀다.”

현 PD는 이 같은 분위기가 당장 바뀌기는 어렵지만 “패배의 누적을 통해 역사는 발전한다”고 믿는다. 그는 “자본주의 폐해를 극복하는 방안은 노동운동밖에 없다”며 “산별노조가 새로운 노동운동의 불씨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85년 KBS에 입사한 그는 현재 환경정보팀에서 ‘세상의 아침’을 연출하고 있다.

임현선 기자 vivasun5@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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