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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법칙과 영화나 드라마의 법칙중에서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이 이벤트 필요유무에 있는 것 같다. 사실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데 어떤 극적인 사건이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지내다 보니 정이 쌓이는 것이지, 어찌  어떤 한 사건에 의해서 사랑이 시작되며, 또 변화가 생기겠는가? 요새, 현실에서 사실 이벤트가 꽤 유행이긴 하다.

하지만 영화를 준비하면서 가장 난감한 것이 영화에서는 이벤트 같은 사건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어 주는 것에는 반드시 굵직한 사건이 필요하다. 이런게 내가 삶을 보는,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공이 부족해서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삶을 유려하게 그려 내고, 진실되게 그려내는데 사건에 의존하지 않고 인물을 그림에 천착할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이번 영화를 하면서 그 어느때보다 인물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 흔히들 이야기 하는 캐릭터의 구축.
극중 인물을 만들면서 크게 3가지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프랑스에서 좋은 포도주를 생산하려는 곳에서는 양질의 땅에 포도를 심지 않는단다. 너무 땅이 좋으면 그 포도나무가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고 적당히 내려서 충분한 양분을 대지로부터 안빨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척박한 땅에 심어진 포도나무는 악착같이 뿌리를 내리고 땅의 양분을 온몸을 다해 흡수한단다. 자 너는 어느 땅에서 자라는 포도나무냐?

두 번째 이야기는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다.결승점에 절대자가 서있다가 도착한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가 빨리 왔나로 순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면서 본 꽃들의 이름을 써라.

세 번째 이야기는 말과 달팽이 이야기다. 빠르게, 더 빠르게만 달려가던 인물이 있다. 절대자가 보니 그가 이렇게 계속 달려가다가는 그의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다. 그래서 그를 천천히 걷게 만들었다. 말인 그를 달팽이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자, 이때 그의 삶은 어찌될 것인가.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것인가, 과거를 그리워만 할 것인가. 장애는 말같은 삶을 살던 우리의 주인공에게 절대자가 요구하는 달팽이 되기의 요구였다.

일거리를 놓친 드라마 PD인 지환이 다시 일을 하게 되는 이벤트-아니 극적인 사건을 무엇으로 만들것인가. 처음에는 본부장을 설득해서 연출을 하게 하는데 직위의 상승을 이용했다. 하지만 그건 주인공이 벌인 이벤트가 아니어서 성에 차지 않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위기의 극복은 철저히 주인공의 힘으로 해내야 한다.그래야 힘이 붙는다.사건의 시작도 주인공이, 해결도 주인공이! 이때만이 드라마에 힘이 생긴다.

이번에 만들어낸 이벤트는 마음에 든다. 그가 본부장에게 보여준 이벤트는 자신의 힘으로 계단을 걸어올라가는 것이었다.간강상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이렇게 보인다.  나는 이 장면에서 음악도 사용하지 않고, 그저 주인공의 호흡만으로 가려 한다. 아주 쿨하게 인물을 응시하고 싶다. 그리하여 만들어낸 이야기가 만들어 낸 이야기 같지 않게 느끼게 하고 싶다.
이벤트의 개발이, 즉 사건의 풍성한 개발만이 지루함을 없애고 사람의 관심을 끈다. 

김영진 KBS 드라마 1팀 PD

1987년 KBS에 입사해  <사랑하세요> <야망의 전설> <아름다운 비밀> 등을 연출했다. 그는 2000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 뒤 4개월간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었다. 기적적으로 의식을 찾은 그는 피눈물나는 노력 끝에 휠체어에서 일어나 지팡이에 의지해 걸을 수 있게 됐다. 현재는 영화제작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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