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남은 건 총상, 자폭 테러리스트의 순진한 눈빛과 아픔뿐”
상태바
“내게 남은 건 총상, 자폭 테러리스트의 순진한 눈빛과 아픔뿐”
  • PD저널
  • 승인 2007.07.04 18: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년간 이라크 내에서 미군테러 주도…주민들 반발에 고향으로 쫓겨와

만나자 마자 그는 자랑스럽게 이라크에서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그(아부 라니아(38)가명)는 이른바 이라크에서 활동하던 테러리스트, 자칭 이슬람 전사다. 필자가 그를 만난 것은 그의 집에서다. 평소 이라크를 자살 폭탄 테러와 혼란으로 몰고 간 이라크로 원정 온 외국출신 이슬람 전사들이 누굴까 하고 궁금해 했는데 그는 상상과 달리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이었다.

온화한 인상의 테러리스트

그는 원래 팔레스타인 사람으로 부모님이 레바논으로 피난을 나온 뒤 P 팔레스타인 캠프에 정착한 후 레바논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달리 유머도 많고 머리도 좋아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타향인 레바논에서 거의 입에 풀칠하며 사는 피난민이었고 그의 어린 시절은 가난으로 얼룩졌다. 사춘기에 들어서서 그는 자신이 열심히 공부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작 공부하는 것을 포기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시작한 것은 길거리 노점이다. 고생하는 부모님을 돕고자 장남인 그는 14살부터 학교를 접고 난민촌 내 시장에서 과일을 팔았단다. 그러나 그것도 그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난한 난민촌 안에서 그리 수요가 많지 않았다. 그리고 택한 것이 팔레스타인 당에서 잡심부름을 하는 것이다.  

 
▲ 레바논과 이라크 등지에서는 여전히 수없이 많은 폭탄테러로 인명 피해가 나고 건물이 부서지고 있다.

18살쯤 됐을 때 그는 정식 청년 당원이 됐고 점점 이슬람의 교리에 심취했다. 종교만의 그의 탈출구였다고 한다. “코란을 읽는 소리만이 나의 안식처였다. 나는 신을 위해 태어났음을 느꼈다. 그리고 신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것도 느꼈다. 내 나이 18에 나는 신을 위해 죽기로 각오했다. 어차피 나의 미래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가난 벗어나려 테러조직 입문 

그 뒤 그는 ‘이슬람 알 지하드’라는 난민 캠프 내의 무장그룹에 들어가게 됐고 그 조직에서 각종 무기 쓰는 법과 전투하는 법을 배웠다. 이미 팔레스타인 난민촌 내에는 각종 무기들이 있었고 그에게 이런 전사가 되기 완벽한 환경을 제공한 것이다.
“부모님께서는 많이 걱정했지만 나는 신(알라)의 길이라며 설득했다. 신이 나를 전사의 길로 인도했다. 나는 우리를 이쪽으로 내몬 이스라엘과 미국을 향해 총을 쏘는 것이 신이 내게 주신 사명이었다.”

그리고 그 이슬람 무장 그룹은 그에게 한 달에 200여 달러의 월급을 줬다. 지금껏 제대로 직업을 가지지 못했던 그에게 200달러는 너무 큰 돈이고 본인이 생각하는 종교관에 입각해서도 안성맞춤인 직업이 이 이슬람 전사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이슬람 전사의 길을 가게 됐고 결혼도 해 아이를 5명이나 얻었다. 하지만 지금도 레바논군을 공격하고 신분을 위조해 시리아 등지도 다녀오곤 했다고 한다. 생계에도 문제가 없고 항상 ‘지하드(성전)’을 가슴에 새기고 이슬람 전사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단다.

그렇게 나이가 30대 중반으로 접어 들었을 때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다. 그 소식을 듣고 그는 바로 이라크로 가서 이라크 사람들과 함께 미군을 향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아내의 만류가 이어졌다. 그의 아내는 그보다 5살이 어린 사촌 누이였다. 눈물로 가지 말라고 했지만 그는 “나는 이슬람 전사로 의무를 가진 사람이다. 가족들보다 나는 신(알라)의 길이 더 중요하다”며 아내를 설득했다.

그리고 곧장 위조된 신분증으로 요르단 암만으로 갔다. 암만에는 겉에서 보기에 무슨 부동산 중개 사무실이나 무역회사처럼 가장한 중간책 사무실이 있단다. 그곳을 찾아가면 이라크로 들어가는 과정이나 무장 단체 조직 등을 소개해준다고 한다. 그가 그 사무실에 도착 했을 때 중동 각지에서 몰려든 미국에 대한 증오로 피가 끊는 젊은이들이 사무실로 모여 있었다고 한다. 그 무리들과 함께 이라크로 들어갔다. 처음 그가 배정 받은 도시는 이라크 북부도시 ‘모술’부근이었다. 그리고 3년 가까이 이라크에 머물면서 전투를 하고 테러를 했다.  

미군 죽이기에만 집중 

“나는 미군들에게 테러리스트로 불렀다. 이라크에서 안 써본 무기가 없었다. 길거리에 폭탄도 매설해서 미군들이 지나갈 때 터트려 죽이고 카추샤 로켓도 미군 기지를 향해 쏘고 달아나기도 했다. 물론 총 쏘고 하는 전투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 과정에 그는 3번이나 총을 맞았다. 다행히 치명적인 부위는 비켜가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시간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라크 사람들을 도와주러 이렇게 싸우고 있고 그것이 신을 위한 길이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가족들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고 오로지 살인 기계처럼 미군 죽이기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이라크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동안 동조를 해주던 이라크 사람들이 점점 그들의 곁을 떠났고 심지어는 외국에서 들어 온 이슬람 전사들을 축출하고 살해하는 마을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점점 마을에 은신하기 힘들어졌고 그는 혼란에 빠졌다.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신의 뜻에 따라 이들을 도와주러 왔는데 왜 이라크 사람들이 우리를 꺼리기 시작했으며 축출하려는지. 나는 오로지 한명의 미군이라도 죽이려고 여기서 목숨 내놓고 싸우고 있는데.”

그때 이라크의 분위기는 이러했다. 그동안의 폭탄 테러와 전투로 벌어진 이라크 혼란의 주범이 바로 이런 외국에서 온 이슬람 전사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라크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슬람 전사들의 경우 알카에다와 연계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라크 안에서 그들의 활동은 곧 이라크 사람들의 안전에 많은 문제를 안겨줬다.

이 이슬람 전사들이 한 건하면 미군의 수색이 마을 안으로 이루어지고 그럴 때 마다 관계없는 마을 사람들 까지도 서넛이 죽어나가거나 미군에게 체포당하는 일이 전쟁이후 계속 됐기에 이제 이라크 사람들도 지칠 대로 지친 상태이다.

테러에 지쳐 등 동리는 이라크 주민들
 
“이제 그만 우리 이라크에서 나가주세요 우리도 이제 이 이라크에서 인간다운 생활을 하고 싶다”라는 것이 대다수 이라크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매일 벌어지는 폭탄 테러와 전투로 하루에 100여명이 죽어 나가는 것이 다반사인데다 갈수록 심해지는 검문을 피해 시장이나 학교 같은 서민들이 다니는 소프트한 장소를 노리고 폭탄테러를 하다 보니 너무도 많은 이라크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토종 이라크 저항 세력과 이 원정 온 이슬람 전사 간에도 분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협조도 해주던 이라크 토종 저항세력들도 죄 없이 죽어 나가는 시민들을 보며 생각을 달리한 것이다.분위기가 이쯤 되니 이라크에서 더 이상 전사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100여명이 죽어나가는 테러를 해도 뉴스에 별로 나지 않는다. 큰일 벌여서 이슈화 시켜 자신들의 행동을 과시하는 테러리스트들에게는 기운 빠지는 일이다.

다른 동료들도 하나둘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도 5월초 레바논 본인의 집이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그의 아내는 거의 매일 울다시피 하고 살았고 아이들은 부쩍 컸다. 그의 아내는 “나는 남편이 왜 이라크로 들어갔었는지 잘 모른다. 신은 그것을 내 남편에게 시켰는지 몰라도 왜 나에게까지 그런 고통을 줬는지 남편이 살아 돌아 온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다시는 이라크에 가지 못하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라크에서 돌아 온 후 다시 다른 무장 단체로 복귀했다. 항상 양쪽 주머니에 권총을 하나씩 차고 집안 곳곳에 총과 RPG7(휴대용 로켓 추진기)을 놓아둔다. 며칠 전 레바논 군이 자신의 집을 향해 직접적으로 쏘아댔다면서 그때 집안으로 난 총알 자국을 보여줬다. 아이들과 아내는 그런 아버지와 남편이 걱정스럽기만 하다. 물론 이 가족의 생계는 이슬람 전사로 일을 하기에 감당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언제 아버지를 잃을지 언제 남편을 잃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평범한 가장의 역할은 언제 가능할까

큰딸 라니아는 “아버지가 총을 가지고 밖에 나가시면 그날 안 들어 오실까봐 겁이 난다. 난 아버지가 이라크에 다녀온 사실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왠지 말하면 안될 것 같아서이다. 아버지가 위험한 일 안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필자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 이라크 3년간 무엇을 남겼느냐?” 그의 대답은 “신을 위해 싸웠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그러나 나에게 남은 것은 없다. 세 번의 총상, 그리고 순진한 눈으로 자살 폭탄테러를 하러 가던 어린 친구들에 대한 아픈 기억뿐이다. 그렇다고 이슬람 전사로의 길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나는 앞으로도 줄곧 신의 길에 따라 총을 들것이다”며 강하게 말했다.

필자는 그런 그가 왜 이 잘못된 길을 멈추지 못하는지 안타까웠다. 과연 그들의 신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진정한 길이라고 할까? 남들처럼 그도 좋은 아버지와 남편으로 평범하게 살길 바라지만 그에게는 어림도 없는 길 같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