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차가 지하도를 만나던 날
상태바
유모차가 지하도를 만나던 날
  • 김현정 CBS 이슈와 사람 PD
  • 승인 2007.07.12 11: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현정 CBS ‘이슈와 사람’ PD 

‘이제 한 번만 더 오르면 된다. 힘을 내자! 계단은 50계단. 젖 먹던 힘까지 여엉차!’

내가 사는 아파트 앞에는 대형 백화점이 있다. 집 앞이라고는 하지만 왕복 8차선 도로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지하도를 통해야만 백화점에 닿을 수 있다. 따라서 아기를 낳은 후 한 번도 혼자 유모차를 끌고 백화점에 가볼 ‘꿈’을 꾼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난주일. 나는 평소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하는 아기를 위해 그 대형백화점에 무료로 개방된 놀이동산을 구경시켜주고 싶다는 아이디어가 퍼뜩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그 백화점으로 가는 지하도는 지하철 고속터미널역과 통해 있고 아마도 노약자용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을 거라는 기특한 생각이 든 것이다. ‘고속터미널역이면 유동 인구가 몇인데 설마 노약자용 엘리베이터가 없겠어? 내가 못 본 거겠지.’ 

용감한 아기엄마는 유모차에 아기를 싣고 길을 나선다. 울퉁불퉁 보도블록에 아기가 멀미를 하는 듯 칭얼거린다. 울퉁불퉁 보도블록을 하루 이틀 다닌 것도 아닌데 왜 저 아이는 적응을 하지 못할까. 생각하며 지하도까지 닿는다. ‘에게 없네?’ 엘리베이터가 없다. 내가 평소 이용하던 그 입구에만 없던 것이 아니라 이 입구 저 입구 모두 다녀 봐도 뵈질 않는다.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순 없지. 일단 기저귀 가방을 어깨에 메고 그 손으로 10kg 아이를 든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5kg 유모차를 번쩍 들어올린다. 엄마는 여자보다 강해서인가 두둑이 먹어둔 점심 덕분인가. 적어도 남 보기에 불쌍해보이지는 않을 만큼 번쩍 들어 올린 채 나는 50개의 계단을 내려왔다. 

공사때문인지 중간에 계단이 한 번 더 나온다. 아직은 힘이 있다. 다시 한 번 영차! 드디어 백화점 입구까지 닿았다. 이번에는 백화점으로 진입하기 위한 마지막 열 계단이 나타난다. 그래도 백화점답게 장애인용 전동 기계가 설치돼 있군.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멀쩡해 보이는 기계가 움직이지를 않는다. 저 멀리 계단너머 직원이 보이지만 유모차를 들고 직원에게 갈 방법이 없지 않은가. 결국 유모차를 들고 또 한 번 번쩍! 아, 지친다. 지옥 훈련이다… 집에 돌아갈 일이 벌써부터 걱정이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는 유모차를 끌고 지하도를 건너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번득 나의 뒤통수를 때리는 질문. 나야 아기가 클 때까지 참으면 된다지만 평생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들은 어떻게 다녀야하지? 울퉁불퉁 아무런 표시도 안 돼 있는 보도블록을 시각장애인들은 어떻게 걸어 다니지?  

장애인들이 이동권 보장을 주장하며 줄기차게 하던 농성을 ‘늘 있어왔던 농성’ ‘들어주기 쉽지 않은 주장’으로 무심히 넘겼던 내 자신이 한참 부끄러웠다. 그들에겐 하루하루가 ‘지옥훈련’일지 모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