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87년 6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넥타이부대들이 나섰다. 시위대의 머리 위로 광화문과 종로의 건물들에서는 하얀 새들이 날아 내렸다. 시위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 다른 넥타이부대들이 두루마리 화장지를 풀어 날린 것이었다. 기원이었고 축복이었다.

침묵, 그리고 죄책의 세월을 보냈던 방송쟁이들은 7월이 되어서야 움직였다. 7월 13일 MBC 보도국 기자들이 ‘방송언론의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다짐’을 발표했다. ‘진실을 왜곡, 조작함으로써 전국민의 여망을 외면해왔음을 뼈저리게 반성’했다. 7월 14일 MBC 프로듀서들이 ‘방송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결의’를 다졌다. 편성과 제작의 자율권을 보장하고 프로그램에 대한 검열을 철폐하라고 요구했다. 7월 16일 MBC 기자, PD, 아나운서, 기술인들은 방송민주화를 요구하며 ‘MBC 방송민주화추진위원회’(약칭 방민추)를 결성했다. 방민추는 이후 방송과 신문의 언론민주화운동에 불을 붙인 도화선이었다.

KBS는 7월 18일 전체 PD회의를 개최, 참다운 공영방송을 위한 선언문을 채택하고 7월 20일 ‘한국방송공사 프로듀서협회’를 창립했다.

PD들의 움직임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미 대세가 기운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무임승차했다고 또 자책했다.
그렇다고 강요된 침묵과 왜곡의 세월 동안 부끄러움과 비분이 없지는 않았다.

70년대 중반과 1979년 10·26사태 직후 PD 모임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유신시대의 억압과 공포가 움직임을 만들었지만, 그 움직임을 좌절시킨 것 또한 억압과 공포였다.

본격적으로 일이 추진되었던 것은 1980년 서울의 봄을 맞고서였다. 5월 17일 ‘(가칭) 한국TV드라마PD협회’가 결성되었다. 당시의 결의문은 ‘프로그램 제작에 있어서 자율성과 창조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프로그램 제작에 유형무형으로 가해져 온 일체의 타율적인 힘을 배제하며’, PD가 자율적으로 방송 제작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협회보도 만들기 위해 몇몇 PD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한국 PD 1호’인 최창봉 선생을 인터뷰하고 사진도 찍었다. 

하필이면 5월 18일 하루 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계엄령과 광주의 학살, 협회는 유야무야되어버렸다. 언론 대학살에는 협회 결성을 주도했던 PD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시 침묵. 오래 꾹꾹 눌러둔 분노는 자조로 변한다. 체념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욕망은 결핍에서 생겨난다. 풀포기 하나 없는 불모의 땅에서 자라난 희망만이 진실하다.

1985년 3월 KBS와 MBC의 PD들 51명을 발기인으로 ‘한국방송프로듀서협회’를 위해 창립 총회를 준비했다. 80년의 강경한 결의문과는 달리, 이때의 취지문은 부드럽기까지 하다. ‘우리는 방송활동을 통해 미래지향적이고 가치지향적인 방송문화의 창달을 도모하여야 할 시대적 요청을 절감… 협회를 발족하기로 하였다.’ 정치권력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이런 소심함, 혹은 비겁함(?)은 겨울공화국에서 체득한 생존 노하우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김대중씨의 귀국, 미문화원 점거사건 등으로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지난 7월 14일, MBC PD들이 입을 연 지 20 년이 되었다. 7월 18일 오늘, KBS PD협회가 창립된 지 20 년이 되었다. 이 날들은 기념되어야 한다. 자부심과 함께 무임승차의 자책감도 기억해야 한다. 부끄러움의 기억만이 부끄러움을 씻어낼 수 있다. 또한 선배들의 노력과 시도들도 정당하게 자리매김해야 한다. 화롯재에 숨겨졌을망정 그 불씨가 아니었더라면 잉걸불은 없었을 것이고 PD들의 부끄러움은 더 길고 깊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