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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미 EBS ‘시네마 천국’ PD

영화 <화려한 휴가>의 시사회가 열리는 극장. 공짜로 표를 얻어 개봉되기 전에 영화를 보게 된 관객들은 들뜬 마음으로 영화를 즐길 완벽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영화가 서비스해주는 웃음거리에 자지러지듯이 웃고 영화가 눈물 흘리라고 하면 기꺼이 눈물을 내준다. 이준기가 죽을 때도 안성기가 죽을 때도 김상경이 죽을 때도 같이 ‘악’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읍’ 숨을 참는다.

우스갯소리로 우리나라에서 건물 부수고 한강 다리 무너뜨리는 본격적인 괴수 영화가 나오지 않는 건 물론 제작비나 기술적인 문제도 있지만 괴수가 나타나 부숴주지 않아도 실제로 백화점이 무너지고 한강 다리가 무너지는 공포스러운 상황이 실재했고 그 아픔을 치유하고 대상화시켜 바라볼 만한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이 흐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나름 그럴 듯한 말도 있다. 80년의 광주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직 정리되지 않은, 정리될 수 없는 뜨거운 소재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시간이 27년 흘렀어도 <화려한 휴가>가 본격적으로 처음 5·18을 영화화했다고 얘기할 만큼 어려운 소재였을 것이다.

물론 나도 비극이 일어났던 그 시간에 우유나 먹고 잠이나 자는 아기였고 대학에나 가서야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주워듣는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왠지 뭐랄까 광주 얘기를 꺼내기도 그렇고 물어보기도 그렇고 어떻다고 내 의견을 설명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침묵하기도 부끄러워지는, 뭔가 무겁고 죄스럽고 답답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게 됐다. 잔인한 살육장면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실제의 억압 때문에 마음 편하지 않았다는 것이 맞는 말일 터. 시사회 관객들 중 많은 사람들이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와 다름없이 주인공에 자신을 이입시키며 착한 편의 비극에 슬퍼하고 절대적인 악으로 대변되는 나쁜 놈 편을 미워하며 영화를 보는 것에 놀라기도 하면서.

〈화려한 휴가〉, 〈오래된 정원〉, 〈꽃잎〉 등 광주를 부분적으로 혹은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들을 주제로 〈시네마 천국〉의 진행자인 세 명의 영화감독들과 토크를 촬영하면서 한 감독은 대학교 1학년 때 ‘갱지’에 인쇄 된 종이를 숨어서 보며 광주를 알게 됐다고 했다. 다른 감독들도 대학시절 외국 방송사에서 촬영한 흑백 다큐멘터리 테이프를 돌려본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5·18의 이미지는 특집 기획으로 만들어진 지상파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와 역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청문회 정도일까. 어떻게 보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아서 믿겨지지 않는 그 봄의 이야기는 젊은 사람들이 옛날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며 어른들이 개탄할 만큼 잊혀지고 있기도 하다.  

과거의 일을 제대로 청산해 본 적도 없고 청산하는 법을 배우지도 못했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이나 사실을 소재로 삼는 것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어렵고 머리와 가슴 위에 무거운 일이 된다. 하지만 교육용 비디오가 필요할 만큼 잊혀지지 않도록, 언급하기 어려워 꺼려하게만 되지 않도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대로 끝내버리지 않도록 단순히 웃음과 감동과 눈물을 버무린 블록버스터 이외에 무언가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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