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어디쯤 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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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어디쯤 가고 있을까
  • PD저널
  • 승인 2007.08.08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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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게도 상담원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특별히 상담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상담을 해주겠답니다. 그리고 ‘고객님의 좀 더 편리하고 즐거운 생활을 위해’ 무료로 <하나TV> 체험행사를 하고 있으니 ‘한번쯤 체험해 보시는 것도 좋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한번쯤 체험해’보는 것의 앞뒤로 얼마나 귀찮은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는 고객은 필요없다고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상담원께서는 친절함과 침착함을 잃지 않으시고 이번 행사에는 공짜 영화표 2장이 제공된다는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고객은 ‘공짜 영화표 2장’에 살짝 마음이 흔들리며 ‘다소 귀찮아진다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느라 잠시 침묵이 흘렀으며 이 때를 놓칠세라 노련한 상담원께서는 ‘단말기설치는 무슨 요일이 좋으시겠습니까’하고 물어왔습니다.

과연 ‘좀 더 편리하고 즐거운’ 체험입니다. ‘웃찾사’, ‘개콘’ 등을 다운받아놓고는 재밌는 부분만 서치해가며 봅니다. 컴퓨터를 통한 ‘어둠의 경로’보다 훨씬 고화질이어서 좋고 로그인이나 검색어도 필요없으니 더욱 간편합니다.

드라마, 다큐 장르불문 클릭 한 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편리함이 사람을 조급하게 합니다. 버튼에 무슨 자석이라도 달렸는지 조금만 지루하면 바로 포워딩입니다. 〈웃찾사〉는 서너 코너만 보고 드라마는 20분 정도만 보고 다큐는 대충 내용만 파악합니다.

이처럼 조급한 시청행태임에도 시청시간은 더 늘어납니다. 왠지 손가락을 좀 더 놀리면 더 나은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주문형 TV가 보편화되면 어떤 시청행태가 생겨날 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지루한 편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으로서는 위기감을 느낄 만합니다. 내가 만든 프로그램이 포워딩할 기회라도 얻게 될까요?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 프로그램이 되진 않을까요? 

사방에 꿀이 흐릅니다. 쾌락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쾌락은 그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축복인 동시에 재앙이고 축복도 재앙도 아닌 어떤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즐거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시간을 재구성하고 공간적인 제약을 무너뜨려 왔습니다. 그러한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일부러 막을 수도 없고 그 가치를 폄하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흐름입니다. 

거실에서 아버지는 미처 못 보고 놓친 <대조영>의 지난 회를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는 매우 흡족해 하십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녹화 가능한 VCR도 있었고, 녹화를 잘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초간편VTR과 G코드녹화방식이 있었으며 심지어 하드디스크를 장착한 타임머신TV도 있습니다.
편리함의 단계는 매우 정교하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산업과 테크놀로지의 한가운데 있는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커다란 호기심과 조금의 걱정스러움에 휩싸인 채 그것을 바라봅니다.

사방에 꿀이 흐릅니다. 사방이 시퍼런 칼입니다. 사방이 시퍼런 칼 끝에 묻은 꿀입니다. 우리는 진보하면서 퇴행해 갈 것입니다. 즐거워하면서 상처입을 것입니다. 이 거대한 공부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다만 우리가 지혜로워 지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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