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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슭 PD (SBS 교양국)

여름 땡볕 지나고 바람이 서늘했던 무렵 논산 훈련소, 이층짜리 막사 앞뒤로 화단이라고 하기에는 뭐한 몇 가지 식물들이 모여 있는 구역(대충 ‘화단’이라 칭하자)이 있었다. 하루는 연대장 지시로 중대 간 화단 가꾸기 경연대회를 한다고 했다. 일주일… 꽃이야 심었다고 냅다 활짝 필 리도 없고, 어디 돈이 넉넉해 ‘사제’로 갖다 채우기도 여의치 않다. 우리 중대는 야외 훈련을 나갈 때 일부 병력을 차출해 꽃처럼 생긴 식물을 수집하고 그래서 어떻게 저떻게 대충 보기 좋게 코스모스며 들국화며 구색을 갖추긴 한 것 같다.

연대장이 순시가 있는 본선 전날, 연대 선임하사가 먼저 둘러보며 이러저러한 지적을 한다. 그런데 저쪽 8중대가 맡은 화단이 예사롭지 않다. 푸석푸석한 다른 화단과 달리 흙이 거무스레하니 뭔가 오래되고 아늑한 숲속 분위기가 난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중대 훈련 중단, 긴급히 훈련병 전원을 훈련소 절 뒤 숲속으로 투입, 나무 밑동의 검은 흙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랬구나, 검은 흙의 비결은 그거였구나. 뿌리랑 엉켜 있어 야삽으론 안 되고 손으로 퍼 담아야 한다.

기간병들은 빨리하라고 독촉이다. 다른 중대도 훈련을 멈추고 야금야금 이쪽으로 흙을 퍼오고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잘 썩어 숙성된 양질의 검은 흙이 그리 넉넉할까. 게다가 8중대에서 이미 훑고 간 마당에. 리어카에 궁색한 양을 싣고 오는데, 저쪽 중대 인사계가 훈련병들을 독려하며 의기양양하게 리어카를 인솔하고 온다.

리어카에 실린 그것은… 연탄! 연탄이었다. 그네들은 연탄을 워커발로 곱게 빻아 화단 흙과 섞고 있다. 아 여기는 군대구나, 흙이나 연탄이나 검으면 되는구나! 연대장의 심사가 있을 다음날, 문제의 그 중대 인사계가 신문지로 싼 뭔가를 오토바이 뒤에 잔뜩 싣고 아침 일찍 출근한다. 신문지에 쌓인 그것은… 국화! 그것은 국화였다. 장례식장에서 보던 국화! 그네들은 국화를 꽂았다. 화단에다 꽂았다. 아 여기는 군대구나, 뿌리가 있든 없든 꽃이 펴 있으면 되는구나! 그 중대가 정말 1등을 했는지, 오리지널 검은 흙 중대가 1등을 했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그저 당연히 결과가 안 좋아 괴롭힘을 좀 당하리라 예상했는데 별로 그러지 않았고, 기간병들이 오히려 피식피식 웃었던 것만 기억이 난다. “군대는 잔머리야.”

보기에 좋았다. 오래 잘 가꾼듯한 아늑한 색깔의 흙이 깔려 있고, 가을국화는 노랗고 하얗고 오와 열을 맞춰 활짝 피어 있었다. 그 중대 인사계는 그 짧은 기간에 감히 누구도 가능하리라 예상치 못했던 일을 해낸, 추진력 하나는 끝내주는 인물로 평가 받을 지도 모른다. 중대 화단도 해냈으니 전 훈련소 화단도 다 해 낼 거라 든든한 신임을 받을 지도 모른다. ‘그것이 연탄이었소’, ‘그것이 국화를 꽂은 것이오’라고 외치는 것은, 그를 흠집 내기 위한 질투와 모략으로 치부될 지도 모른다.

군을 희화화하는 군사기밀을 외부로 유출한 범인을 찾기에만 법석을 떨지도 모른다. 흙인지 연탄인지, 뿌리가 있는지 없는지는 개의치 않은 채로…. 
지나고 보면 그건 15년 전 군대서 일어난, 그저 군대라 그러려니 하는 해프닝일 뿐이다. 15년 전이 아닌 지금 현재에, 그것도 군대가 아닌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다, 절대로,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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