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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호 단국대 언론영상학부 교수

지금 흥미로운 책을 한 권 읽고 있다. ‘소모’ 또는 ‘탕진’ 정도의 뜻을 가진 벤자민 바버가 쓴 ‘consumed’라는 책이다. 책의 핵심은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주의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를 소비에 몰두하는 철부지들로 만들어버리고 있으며 이는 민주주의의 지속, 그리고 정작 자본주의 자체의 지속에도 필요한 사회적 역량을 고갈시키는 행위라는 것이다. 

자본은 본래 생각 없는 노동자와 생각 없는 소비자를 바람직한 인간으로 추앙한다. 생각하는 노동자, 생각하는 소비자는 원활한 생산과 소비, 원활한 순환과 이윤달성이라는 자본의 운동에 문제를 제기하는 방해집단이기 때문이다. 물론 생각 없다는 말은 과장이고 정확히 말하면 (위에서) 시키는 대로 일하고 (광고가) 쓰라는 대로 쓰는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생각을 할 줄 모르는 것을 뜻한다. 

이런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철부지일 수밖에 없고, 자본은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은 더더욱 이런 인간들을 만들어내는데 최대의 역량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세대가 지날수록 사회는 철부지들로 가득 차게 되고, 이는 노예사회로 이어지며, 결국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지속 그 자체를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다. 책의 부제도 그래서 ‘어떻게 시장은 어린이를 소비자로 전락시키고, 어른을 철없는 아이로 만들며, 건강한 시민의 이성을 갉아먹고 있는가’이다.

거칠게 요약한 바버의 주장이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결국 합리적 판단능력을 갖춘 이성적 주체로서의 시민의 회복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발전을 위해 시급한 사회적 과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실천될 가능성은 특히 우리 사회로 눈을 돌릴 경우 높아 보이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살아남기, 경쟁에서 이기기, 좋은 대학가기 위한 요령 정도 이외에는 배우는 것이 없으니 아는 것도 없고, 생각할 줄도 모르고, 시험 잘 보는 기술 정도만 가지고 크는 젊은이들. 또 그런 것들만 가르치는 학교, 또 그런 것들 위주로 가르치지 않을 수 없도록 구조화된 교육제도. 그러니 사회 전체가 가벼워지고 유아적 욕망에 사로잡혀 반성할 줄 모르는 이기적 개인들이 넘쳐난다. 공동체에 대한 개념과 연대의식, 역사에 대한 책임 같은 것을 이들이 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듯 사회적 성찰의 역량이 부족하니 생각이 좁고 짧을 수밖에 없는 조중동 같은 언론이, 놀아주고 잡담해주는 방송이, 이렇다 할 비전도 없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정치인이, 가능한 한 (대)기업을 위해 일하는 관료가, 공부하지 않는 교수가, 노동자를 무시하는 기업인이, 법조문만 달달 외는 판사·검사가, 돈을 더욱 사랑하는 의사·변호사가, 사랑과 자비가 입에만 붙어있는 종교인 등등이 훨씬 많은 사회. 기껏해야 좀 큰 부동산 개발업자 수준의 사람과 친미반북 정도의 사고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으로 (적어도 지금까지는) 대선판이 짜여 지는 가여울 정도로 유치한 수준의 나라.  

하긴 지금 세계를 어지럽히고 있는 부시 같은 사람도 자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철부지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자본가들이 주도하고 국가가 후원하는 철부지들의 사회는 교정되지 않는 한 결국 그들 스스로의 발등을 찍는 결과를 빚을 것이다. 전 지구적 범위로 확대되는 환경재앙은 그 같은 결과가 그리 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징조이다. 이런 점에서 대체로 철부지들만을 길러내는 오늘날의 정치·경제·사회체제를 바꾸지 않는 한 미래는 대체로 우울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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