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한중 / EBS 기획다큐팀 PD |
사실 나도 좀 놀라웠다. 30년 전 기억이 고스란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땐 정말 TV를 보다가도 이 말만 흘러나오면 어머니는 내 잠자리를 펼치셨고 나는 자야 했다. 아니 정말로 졸렸다. 9시 이후의 텔레비전은 당시 나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그 방송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마치 어른이라도 된 것처럼 으쓱하기도 했다.
“피~그런 게 어딨어.” 아이는 여전히 입을 비죽거리며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다. 난 좀 억울했다. 내 말을 믿지 않는 아이 때문이 아니라 30년 전 TV가 하는 말을 굳게 믿었던 나의 순진함 때문에. 나는 TV의 개념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그야말로 실감한다. 이미 아이에게 TV는 보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7살 아이는 TV를 보기 보다는 VOD를 주로 이용하고 있다. 아이는 보고 또 보고, 돌려보고 멈춰보고 자유자재로 프로그램을 입맛대로 요리한다.
30년 전 내 체험과 15년 전 학교에서의 배움, 그리고 10년 전부터 시작한 방송일이 과연 지금의 나를 지탱해 줄 수 있을까. TV를 대하는 나의 자세는 7살 아이보다도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지 못한데 말이다. 시청자의 시간대별 라이프사이클을 분석하고 그것을 토대로 편성을 하고 또 거기에 근거해 한 땀 한 땀 제작을 해나가는 방식이 과연 얼마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을까. 당장 내년 아니 내일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진화한 TV서비스와 능수능란한 TV이용자를 새롭게 보게 될까.
여전히 아이는 잠들지 않고 있다. 물론 여전히 ‘30년 전 어린이 9시 취침설’은 믿지 않으려는 태세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아이보다 먼저 졸음에 겨워하고 있다. 그 와중에 나는 내가 꺼낸 카드를 슬그머니 뒤춤에 감추고 싶어진다. 아이를 재워보겠다는 일념에 무심코 살려낸 그 기억은 명분도 실리도 챙기지 못하고 나만의 망상으로 귀결되고 있다. 아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아이와 맞서기 위해 무슨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