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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보다는 절제된 연기를 통한 표현
인물의 성격과 심리를 위한 셔레이드
최상식-KBS 드라마제작국장

|contsmark0|‘대부’에는 돈 콜레오네로 분한 말론 브란도가 정원에서 손자와 노는 장면이 있다. 그는 오렌지 껍질을 틀니처럼 보이도록 입에 넣고는 얼굴을 찡그리며 토마토 밭을 가로질러 손자를 뒤쫓는다. 소년은 깔깔거리며 이 무소불위(無所不爲)한 존재에게 살충제를 뿌려대고…. 장난이 계속되는 동안 돈 콜레오네는 심장마비로 죽어간다. 그 순간 비로소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면서…. 이 독특한 장면에서 감독과 배우는 범죄조직 내에서 삶과 죽음을 지배하는 이 카리스마의 사악하고도 코믹한 이미지의 묘사를 위해 탁월한 무대장치와 소도구를 선택했다. 아이들의 놀이인 ‘숨바꼭질’과 ‘오렌지 껍질로 만든 마스크’는 돈 콜레오네의 ‘인간적인 면’과 ‘악마성’을 각각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셔레이드를 통해서 관객은 미학적으로 강조된 성격의 양면을 보게되는 것이다. 앞에서 밝혔듯이 셔레이드는 바로 인간의 내면성을 표현하기 위한 노력에서 출발되었다. 따라서 셔레이드 기법은 무엇보다도 등장인물의 성격과 심리변화를 포착하는데 초점을 맞추게 된다. ‘대부’의 첫 장면은 유태인 보나세라가 대부 돈 콜레오네 앞에서 읍소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화면상으로는 대부의 모습이 보이지 않다가 서서히 대부의 어깨선이 나타난다. 뒷모습의 대부는 무게 있는 동작의 손짓 사인으로 울먹이는 보나세라에게 물을 주라고 지시한다. 보나세라가 딸을 성폭행한 자들을 죽여 달라고 속삭였을 때 비로소 돈 콜레오네는 관객 앞에 얼굴을 보인다. 그의 검은 야회복 윗주머니는 장미꽃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품속엔 고양이 한 마리가 등을 쓰다듬는 주인의 손길 아래 지긋이 눈을 감고 있다. 보나세라가 그에게 ‘대부(god father)’라고 부르며 복종을 서약하고 난 후 돈 콜레오네는 그에게로 다가가 다정히 어깨를 싸안으며 대부로서의 도움을 약속한다. 말론 브란도는 극도로 절제되고 양식화된 정중동(靜中動)의 연기방식을 통하여 대부로서의 성격과 카리스마를 부각시키고 있다. 관객 앞에 뒷모습으로만 등장하여 침묵의 연기로 관객을 압도시킨 후 비로소 얼굴을 보임으로써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은연중 과시한다. 가슴에 단 장미꽃은 낭만성을 품속의 고양이는 야수성을 대변하는 갱 두목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소도구이다. 상대방이 완전히 복종을 서약한 뒤 어깨를 감싸안는 결합사인으로서 한 패밀리가 되었음을 인지시킨다. 첫 장면에서부터 대부의 위상과 성격을 관객에게 극명하게 주입시키기 위해서 치밀하게 계산된 셔레이드 기법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1994년 추석특집으로 제작한 <춘향전>에서 담쟁이 넝쿨이 우거진 고가의 담 너머로 춘향(김희선)의 얼굴이 살그머니 올라와 호기심을 가득 담은 눈동자로 바깥세상을 내다보는 것으로서 첫 장면을 장식하였다. 이것은 춘향의 성격을 과거처럼 전형적인 요조숙녀형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생기 발랄함과 적극성, 그리고 동적 에너지가 넘치는 사춘기 소녀로 부각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contsmark1|구로자와가 감독한 영화 ‘생존’의 도입부 역시 인물묘사를 위한 셔레이드로서 시작한다. 와타나베가 책상에 웅크리고 앉아 기계적으로 서류에 도장을 찍고 있다. 생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풀이 죽은 벌레와 같다. 그런데도 서류에 찍는 도장의 위치나 속도가 놀랄 만큼 정확하고 빠르다. 즉 이 남자는 무의미한 분주함에 길들여져 있다. 그 책상 위에 있는 삼각형의 명패엔 ‘시민과장’이라 쓰여 있다. 이 장면에서 주인공 와타나베의 행위를 통해 소개되고 있는 것은 시청에서의 와타나베의 임무(직업)와 그의 성격(생활태도)이며 소도구(명패)를 통해 나타내고 있는 것은 직장에서의 그의 지위이다.
|contsmark2|작품 속에 나타난 인물의 성격과 심리를 드러내는 인상적인 셔레이드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contsmark3|▷‘새끼 여우들’ (감독: 윌리엄 와일러)만성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남편이 아내와 말다툼을 벌이다 심장 쇼크를 일으킨다. 가슴을 부여안고 괴로워하는 남편을 냉정히 바라보고 있는 베티 데이비스. “여보 내 약 좀…” 남편의 애원에 찬 신음 소리를 묵살하며 못 들은 척 딴전을 피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 막대한 유산 상속을 노리고 남편이 죽기를 바라고 있는 그녀의 은밀한 야심을 읽을 수 있다. 냉혹한 배티 데이비스의 표정과 그녀의 상반신 너머로 이층 방에 둔 약을 먹기 위하여 기다시피 계단을 오르고 있는 남편의 필사적인 몸부림이 포커스 아웃된 상태로 희미하게 보이고 있다.
|contsmark4|▷‘노마 레이’ (감독: 마틴 리트)방직공장에 다니는 이혼녀 노마는 노동운동가 루벤의 끈질긴 설득에 의하여 고통의 가시밭길인 노동조합 운동에 뛰어든다. 공장 동료들에게 동참을 호소하던 노마는 해고 통보를 받는 순간 작업대 위에 올라가 침묵의 시위를 계속한다. ‘조합’이라고 쓴 피켓을 높이 치켜들고 있는 노마의 표정 속에서 노조 결성을 위한 그녀의 뜨거운 열정과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contsmark5|▷‘나라야마 부시꼬’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다쓰헤이는 어머니 오링을 지게 위에 태우고 나라야마산을 오르고 있다. 마을 전통에 따라 70세가 된 어머니를 고려장하기 위해서다. 험로를 거쳐 천신만고 끝에 다다른 산정엔 수많은 해골들과 시체를 파먹는 까마귀들이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이별의 순간, 이승에서의 마지막 포옹을 하는 모자. 차마 그곳에 어머니를 버리고 갈 수 없어 오링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다스헤이. 그러나 오링은 아들의 뺨을 때리며 돌려세운다. 그리고 마지막 사잣밥으로 준비한 도시락마저 아들의 지게에 얹어주고 홀로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일체의 대사가 배제된 가운데 오직 셔레이드만으로 묘사된 이 장면에서 일반의 기대와는 달리 노모를 고려장하는 가해자(아들) 쪽이 오히려 동정과 연민을 자아내게 했고 피해자인 어머니 쪽이 비정하게 느껴지도록 연출되었다. 아들은 시종일관 노모를 버릴 수밖에 없는 자식의 고통과 서러움을 연기하였고 어머니는 그런 자식을 격려하고 꾸짖으며 자연에 순응하여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대사보다는 셔레이드를 통해 마지막 길을 가는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교차되는 미세한 심리들을 포착해 내었다.
|contsmark6|상대방의 관심을 끌기 위한 셔레이드는 특히 이성간에 많이 나타난다. 처음 만난 남자가 여자의 옷에 묻은 머리카락을 떼어 준다면 은근한 관심의 표시가 되며, 쌀쌀한 날씨에 코트를 벗어 여자의 어깨에 걸쳐주었다면 노골적인 관심의 표시가 된다. 영화 ‘위험한 정사’에는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도중, 남자의 입가에 버터가 묻어 있는 것을 본 여자가 다른 사람들 몰래 눈짓으로 살짝 알려 주는 장면이 있다. 이 은밀한 구애 제스처가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워지고 결국 위험한 정사에 빠져들게 된다. |contsmark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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