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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종로. 소개팅 중.
그녀 : 신방과생이라고 하셨죠? 영화 좋아하시겠네요?
나 : 예, 제가 왕가위 팬입니다. 현대 매체에서는 영상이 중심인데 왕가위는 그 영상문법이 대단하잖아요? (어쩌구 저쩌구 잘난척…) 왕가위 신작이 나왔는데 보실래요?

주위에서 귀동냥한 걸로 왕가위와 영상문법(!)을 들먹였지만, 2년간 영화 한 편 본 적 없는 대책 없는 신방과생이 당시의 나였다. 성적에 맞춰 진학한 신문방송학과. 나에게 ‘영상’은 졸업장을 위해 공부해야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니, ‘영상은 사람의 감정을 왜곡시키는 잔기술’이라는 것이 당시의 내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감춘 채, 단지 미모의 소개팅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본 영화 ‘중경삼림’.
아하, 난 왜 이런 세상도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물론 유명한 스탭프린팅(인물의 동작을 끊어지듯 촬영해 편집한 기법), 핸드헬드(카메라를 직접 들고 찍은 촬영기법) 등 그만의 전매특허들도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인상 깊었던 것이 있었으니… 임청하-금성무, 양조위-왕정문의 만남과 이별, 절망과 희망을 표현하는 미장센들이 그것이다. 연기가 아닌 그림에 울며 웃으며 요동치는 내 감정들… 난 그 더 이상 ‘영상’을 잔기술로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난 그 무시하던 ‘영상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으며 또 그것을 행복해하고 있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때의 소개팅녀는 알까? 그날 만난 어리숙한 한 남자애의 작업멘트가 그의 미래를 바꾸었음을.

 기훈석 KBS ‘후토스’ PD

영화 ‘중경삼림’(1995년, 감독 왕가위)는?

왕가위 감독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작품으로 1995년 홍콩 금상장 4개 부문(작품, 감독, 남우, 편집), 1994년 대만 금마장 영화제 남우주연상, 1994년 스톡홀롬 영화제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했다.
‘중경삼림’은 실연당한 두 경찰의 이야기로 옴니버스식의 영화 구성을 가지고 있다. 영화에는 ‘임청하와 금성무’, ‘양조위와 왕정문’의 러브 스토리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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