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빛]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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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게 딱 하나 있는데, 그건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점이지….” PD 경력 20년을 훌쩍 넘긴 지금,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르는 소크라테스의 격언이다.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그 무엇’을 밝힌다는 것은 나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PD로서 내 특징은 남들에 비해 ‘첫 회’를 많이 했다는 점이다. 〈생방송 화제집중〉,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연속기획 10부작 미국〉, 〈천황의 나라 일본〉 등등 여러 프로그램에서 첫 회를 맡았다. 스스로 바보임을 인정하고 미련스레 부딪쳐 버리는 게 나의 개성이자 달란트인 것 같다.

좋게 얘기하자면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겠다”는 미련한 충동이 있는 것 같은데, 이러한 정체성이 형성되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건 대학 시절에 읽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치〉였다. 주인공 무이시킨 공작이 이성으로서 사랑을 느끼는 아글라야, 그리고 불행한 운명 때문에 연민을 느끼는 나스타샤…. 공작은 결정적인 순간에 나스타샤 곁에 있기를 선택한다.

무이시킨 공작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지만 인간성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이해하고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자기를 던질 줄 아는 사람이다. 나스타샤를 짝사랑하는 로고진은 무이시킨에게 말한다. “자네가 나스타샤에게 느끼는 감정이 동정인지, 연민인지 모르지만 나의 ‘사랑’보다 자네의 그 마음이 더 강한 건 분명한 것 같네.”

한국전쟁 때 부모를 잃은 ‘늙은 아이들’, 자식을 감옥에 두고 눈을 감지 못했던 장기수의 어머니들…. 아픔을 안고 있었던 사람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분들 생각하면 지금도 덩달아 아파진다. 이분들이 부르면 언제든 하던 일 팽개치고 또 달려가야 할 것 같다.

-이채훈 MBC 외주제작센터 PD

 

‘백치’란?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 소설로 그의 두 번째 여행 기간(1867~1871) 동안에 쓰인 작품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장편 가운데 가장 서정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완전히 아름다운 인간의 형상을 백치인 무이시킨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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