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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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PD의 죽음
  • 승인 1999.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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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kbs 창원총국의 김철환 pd가 지난 1일 교통사고로 운명했다. 그 전날인 5월31일의 <바다의 날 특집 7시간 생방송 ‘바다를 살립시다’> 방송 후 귀가하던 중에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우리가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그저 살아남은 자의 예의로서가 아니다. 32세라는 젊은 나이로 불귀의 객이 된 그의 죽음에는 우리 방송의 비인간적 풍토가 극명하게 압축돼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인간 존중을 말하면서도 정작 방송 노동자의 존엄성은 존중하지 않는 엄혹한 제작환경. 그리고 이것이 지역방송 현장에서는 더욱 중첩된 모순구조로 나타나고 있는 바, 그같은 사고로 이것이 적나라하게 표출됐다고 본다.말이 씨가 된다고 하더니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걸까. 사고 14일전인 5월 18일자 kbs 노보에는 열악한 지역국 근무환경을 한탄하는 그의 글이 실렸다. “마의 5월. 창원총국 편성제작국 조합원들은 5월을 그렇게 불렀다. 여태까지 위태위태하게 버텨왔지만 5월은 도저히 넘길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네트워크 기획, 테마기행, 환경스페셜 전국방송 다큐멘터리 3편, 6시 내고향, 생방송 좋은 아침입니다, 일자리 백만개를 만듭시다 등 늘어난 참여, 로컬 프로그램 개편, 4월말과 5월초의 지역문화축제 중계, 그리고 5월 31일 바다의 날 특집 7시간 생방송 등 (...)”정말이지 경악스런 일이다. 방송 제작에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엄살’이 아님을 알 것이다. 불과 10명의 pd가 해내야 하는 프로그램이 이 정도면 거의 초인적인 노동강도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고 김pd는 이 글을 통해 kbs 창원총국만의 문제가 아닌 지역방송의 현실을 분연히 알림으로써 이것이 공론화돼 어떤 개선이 있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신은 시간을 주지 않았다(아니 시간이 주어졌더라도 타성에 빠진 방송사에서 실효성 있는 어떤 조치를 취했을 리가 없다).연일 계속되는 프로그램으로 그의 피로는 누적될 대로 누적됐을 것이다. 급기야 5월 대장정의 마지막에 투입된 7시간 생방송에서 그의 스트레스는 절정에 달했을 것이다. 이를 달래고자 했을 한잔의 뒷풀이 술은 닥쳐오는 죽음의 위기를 피할 수 없도록 그의 판단력을 떨어뜨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정황으로 볼 때 그의 죽음에는 열악한 제작환경이 주요한 선행조건으로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법적인 산재판정 여부와 무관하게 김pd가 마땅히 순직 처리돼야 한다고 보며 kbs 측의 조치를 주시할 것이다.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했을까. 졸지에 유고(遺稿)가 되어버린 예의 그 글에서 “혹시 누가 아파 드러눕기라도 한다면, 사고라도 당한다면, 불길한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방송시간이 다가오면 다 해결된다는 말을 되새기며 잘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촬영테잎을 챙긴다.”며 애써 자위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탈이었을까. 나쁜 예언은 더 잘 적중한다더니 그는 결국 마의 5월이 마지막 광기를 뻗친 그 심야에 느닷없는 춘사(椿事)로 우리 곁을 떠났다.고인의 죽음이 각별하게 다가오는 것엔 또다른 이유가 있다. 고 김pd는 사실 제11회 한국방송프로듀서상 수상자였다. 그는 <우포늪을 살립시다>로 다른 동료 2명과 함께 지역부문 작품상을 수상했었다. 그런데 지난 5월 28일부터 31일까지는 한국방송프로듀서상의 수상자들이 기념으로 금강산 여행을 다녀오는 기간이었다. 창원총국의 수상자 3명은 앞서 말한 대로의 프로그램 부담 때문에 모두 불참하고 말았다. 김pd의 비보를 듣자마자 당장 떠오른 것은 ‘어쩌면 같이 금강산을 다녀왔으면 사고를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정말 그랬으면 참변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나 인생사는 모를 일이다.금강산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사실 이번 여행 일정에 참여하지 못한 수상자들은 또 있다. ‘올해의 pd상’을 수상한 ebs의 박수용pd가 자연다큐멘터리 수리부엉이에 대한 주요한 촬영으로 인해 불참한 것을 비롯 도합 5명의 pd가 프로그램 제작관계로 금강산 등정의 기회를 반납했다. 참석한 수상자의 대부분도 3박4일의 말미를 만들기 위해 며칠씩 밤을 새며 프로그램을 만들어놓고 왔다고 토로했다. 방송날짜가 박두한 상태에서 편집에 여념이 없던 모 pd는 출발일 당일 새벽에야 결단을 내리고 아무 여행 준비없이 편집실에서의 복장 그대로 합류했다. 그리고 4일간 내내 땀에 절은 같은 옷을 입은 채로 버텼다. 필자는 나중에야 이 ‘비화’를 전해듣고서 결코 웃을 수 없었다. 우리 pd들의 집요한 책임정신과 뜨거운 프로그램 사랑을 확인하는 한편으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착잡함이 엄습했기 때문이다.모처럼의 금강산 여행도 주저하고 포기할 정도로 꿀벌처럼 일하는 pd들. 고 김철환 pd가 말한 것처럼 “imf 시대에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다는 마술과도 같은 주문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일까. pd들은 열악한 환경을 놓고 가타부타를 논할 시간에 우선 그림 한 컷트 더 편집하는 것이 아쉽고 급하다. 여기저기 다니며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할 인맥을 만들 시간도, 취재 중에 획득한 무슨 정보가 있어 증권투자를 할 기회도, 그럴 여유도 마음도 없다. 그저 프로그램에 매몰된 채 세상을 잊고 자기를 잊고 산다. 그것이 우리네 대다수 pd들의 실상이다.방송개혁위원회 논의 당시 방송현업인들을 두고 자사이기주의에 집착하며 자기 밥그릇이나 챙기려 한다는 비난이 끊이지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 말 잘하던 무수한 석학논객들은 그래 방송인들이 끌어안았던 그 잘난 밥그릇이 이런 죽을 노릇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가. 4년여를 끌어온 방송법 논의가 과연 우리 방송의 이러한 실태를 개선하는 것에 무슨 기여를 했는지 울화가 치민다.누가 진정으로 방송을 사랑하고 있는가. 누가 방송을 떠나지 않고 지키며 진정으로 책임을 지고 있는가. 방송을 팔아 사리사욕을 채우거나 권언유착으로 일신영달을 꾀하는 자들은 영원한 현장 방송인으로 우리에게 길이 기억될 고 김철환 pd 영전에 고개 숙이고 옷깃을 여밀 일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본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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