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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와 나
양희은(가수)

|contsmark0|내 어린 날의 오붓하고 따뜻한 저녁시간의 기억은 언제나 라디오와 함께 합니다.거든거든 설거지를 마친 동네 아줌마들은 바느질감을 챙겨서 우리집으로 저녁 마실을 오셨습니다. 우리집에는 재봉틀 만한 ‘제니쓰 라디오’가 있었거든요.전구를 끼어놓고 구멍난 양말을 기우면서 또는 뜨개질을 하면서 라디오 연속극 <장희빈>에 귀를 기울였지요. 어떤 때는 비분강개하고, 욕도 하면서 또는 ‘쯧쯧’하고 가엾게 여기면서 우리는 다들 라디오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장희빈의 목소리는 어찌나 당차고 표독스러웠던지 아직도 그 목소리의 톤이 생각나니까요.우리집에 언제 라디오를 들여놓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라디오를 켜던 그 순간의 놀라운 느낌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정말로 아주 아주 작은 사람들이 라디오 속에 살고 있어서, 그 모든 시간을 꾸려나간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어른들이 없을 때 라디오 뒤쪽을 한참씩 들여다봤고, 한번쯤은 뜯어보고 싶다고도 생각했습니다.라디오가 뜯어질 수도 있다는 건 동네 소리사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는 누가 길에서 무엇을 펴놓고 고치면 온 동네 지나던 사람들이 죄 둘러서서 지켜보던 시절이었고…. 다들 너무 심심했었으니까! 현장실습이 별 것이겠습니까? 말하자면 그게 실습이요 견학이었죠.그 무렵, 왜 모든 아버지들은 늘 집에 계셨는지? 그것도 궁금한 일 중의 하나였지만 사람은 흔해도 할 일이 없던 시절이었고, 나라 전체가 가난했었으니까요. 그래서 전기도 방안이 아주 깜깜해야 켰습니다. 물론 하루종일 라디오를 켠다는 것도 생각 못 했었죠. (왜냐하면 라디오 방송도 종일하지 않았으니까요.) 워낙 여러 가지 물자가 귀했고,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안 하면 안되었고….<장희빈>, <현해탄은 알고 있다>, <남과 북>…. 이렇게 명작 중의 명작인 라디오 연속극을 섭렵(?)하면서, 극 앞뒤에 나오는 주제가 역시 우리의 고정 레파토리였었죠.너무도 아쉬운 불가항력적인 사건이라면, 그 당시 흔했던 ‘정전’이었습니다. 그것도 연속극의 절정에서 꼭 전기가 나갔고, 라디오는 그만 침묵하게 되는 거죠. 어느 집에나 팔각성냥과 양초는 상비품목이었는데, 장롱다리 밑을 더듬어 누군가가 촛불을 밝히면 또 다른 적막강산이 열립니다. 가로등도 없었고, 보름달이 뜨는 밤이 아닌 다음에야 깜깜 절벽이니까 동네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한 가운데 일찍 자리 펴고 눕기도 하고요. 촛불이 밝혀지면 그야말로 다른 세상이 열리는데 그건 전기불의 편하고 환함 대신, 촛불 중심으로 몸도 마음도 모이게되는 묘한 아늑함이었죠. 전깃불 아래서는 맛볼 수 없는 아주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꾼 아줌마의 옛이야기가 시작되면, 우리는 전파를 타지 않은, 연속 방송극을 다시 듣게 되는 겁니다.그립죠? 그 시절, ‘video’는 꿈도 못 꾸었던, ‘audio’만의 풍부했던 세상이!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contsmark1|‘리허설’은 방송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방송계 주변의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코너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contsmark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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