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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계에서 평생을 바쳐 일한 한 어르신이 얼마 전 토론회에서 뼈있는 말씀을 했다.
“언론에 농업과 관련된 이야기는 딱 두 가지 밖에 없는 것 같다. 하나는 정부가 우루과이라운드니, FTA니, 쌀 협상이니, 농산물 개방하겠다고 발표할 때, 그리고 또 하나는 농민들이 서울에서 몽둥이 휘두르고 데모할 때 밖에 없더라.”

수출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에서 돈 안 되는 농업은 애물단지로, 농민들은 눈엣가시마냥 취급받고 있다. 농업은 80년대까지 도시민들에게 안정적인 먹거리를 제공한다며 정부의 계획경제에 철저히 희생됐고, 90년대 이후로는 반대로 시장경제 논리에 의해 퇴출되고 있으며, 이제는 언론에서조차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다.

농업이 더 이상 국가기반산업이 되지 못하고 국익을 발목 잡는 애물단지밖에 안된다면, 서글프지만 퇴출당해야하고 농민들은 시대조류를 못 헤아리는 무지렁이들로 언론의 공격을 받아도 마땅하겠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식량이 부족해 지난해 한 해만 3600만 명이 기아로 죽고 지금도 한 시간에 4000명이 굶어죽을 정도로 세계는 심각한 식량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쌀을 제외한 식량자급률이 5%밖에 안 되는 우리나라에서 농업은 국가안보요, 주권의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농업은 여전히 애물단지일 수 없고, 농민 또한 눈엣가시로 취급돼서는 안 된다. 설령 세계화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 하더라도 10개 농산물 수출국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나머지 137개 WTO 회원국 국민들이 굶어죽고 있는 반인륜적인 체제에 대해서 한 번쯤은 문제 제기 해야 하지 않는가?

국가와 국민들이 오도된 세계화의 이념에 사로 잡혀 있다 하더라도 문제의 본질을 파헤치고 올바른 여론 형성을 선도해야 할 언론마저 고등학교 깜지 숙제하듯 정부의 보도자료만 베껴 천편일률적인 ‘개방대세’만을 반복하는 보도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지난해 한미FTA 반대투쟁 과정에서 지켜본 기자들의 불성실함에 실망했고, 골리앗 같은 언론의 거대한 힘에 절망했다. 한·칠레 FTA 협상당시 자동차 수출이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다는 언론의 집중포화를 견딜 수 없어 기자에게 도대체 어떤 근거로 기사를 작성했냐고 물었더니 바쁘다며 대뜸 정부기관에서 기자들에게 보내는 메일을 포워딩해주겠다고 했다.

자료를 보니 친절하게도 굵은 글자체로 자동차 시장점유율 하락이라고 표현돼 있었는데, 그 바로 밑의 도표를 꼼꼼히 살펴보니 금액점유율은 오히려 상승했고 물량점유율이 하락한 이유도 비준연기 때문이 아니라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환율상승으로 인한 것으로 명확히 분석하고 있었다. 곧바로 자료를 들이대며 2시간 넘게 논쟁을 벌인 결과 기자가 고맙게도(?) 잘못을 시인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 기자의 글을 볼 수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데스크에서 담당기자를 바뀌어 버렸단다.

언론은 단순한 현실을 묘사하는 거울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는 주도체라 생각한다. 한국 언론도 더 이상 오도된 세계화의 이념에 사로잡혀 농업을 퇴출시키고 정부 보도자료로 깜지 숙제만 하려들지 말고 현실을 구성하는 주도체로서의 본연의 역할을 다하길 기대한다.

이영수 /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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