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①창작력을 기반으로 하는 미국 작가들의 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의 에미상을 선정?시상하는 미국 텔레비전 예술과학 아카데미(Academy of Television Arts & Sciences Foundation)에서 매년 미국에서 방송을 공부하는 교수들을 초대해 방송 제작 현장을 연수시키는 프로그램을 주관한다. 지난 6일부터 10일까지 열린 ‘2007 Faculty Seminar’에 참석한 이헌율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교수의 세미나 참관기를 4회 연속으로 싣는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1. 미국 작가들의 막강한 힘
2.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프로그램 제작
3. 시청률, 돈, 그리고 편성
4. 뉴미디어와 새로운 유통망

지난 5일 이후, 미국 할리우드에서는 작가들의 파업이 계속 되고 있다. 작가들의 파업으로 방송사들은 주요 심야 프로그램들을 재방으로 편성하는 등 파행이 이어지고 있지만, 작가들이나 네트워크들은 기존 입장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1988년 파업도 6개월 동안 진행됐고, 또 프로그램 제작을 한 시즌이나 중단시킨 적이 있어 이번 파업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런 가운데 열린 이번 세미나에서도 작가들의 파업은 주요한 논제였다.  

미국의 텔레비전 시스템은 텔레비전 작가가 되기 위한 왕도가 없다는 점에서 한국과 비슷하지만,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 번째는 작가들을 체계적으로 훈련시키는 시스템이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작가들이 성공을 하면 제작자까지도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면에서는 한국의 스크립터보다 더 심한 노동 조건에서 시작한다. 세미나에서 발제를 한 작가 네 명 모두가 처음에는 스튜디오에서 밥 심부름을 하거나 메일을 전하거나 팬레터에 응답하는 것으로 밑바닥에서 시작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사람들과 안면을 익히고, 자기 대본을 사람들에게 읽게 해 한국으로 말하면 ‘새내기 작가’가 되는 것이다.

작가가 된 이후에는 시작단계에서부터 ‘에이전트’들이 작가와 작품을 방송국이나 프로덕션 회사에 소개하고 맺어준다(시트콤 <프렌즈>에 보면, 조이가 에이전트와 이야기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이들 에이전트들은 새내기 작가들을 프로덕션 회사나 네트워크에 연결시켜주고, 대본들을 제작자들이 읽을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런 서비스는 작가들이 성공한 뒤에도 계속되는데, 상대적으로 고용이 불안정한 작가들에게 여러모로 많은 도움이 된다. 심지어는 직접 제작에 관여하기도 해서 예전에는 에이전트들이 제작자중의 하나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보통 새내기 작가들은 프로듀서나 메인 작가 밑에서 일을 하는데, 어떤 시트콤 제작사의 경우에는 이들 새내기 작가만 20명에 가까울 정도로 그 기반이 튼튼하다. 메인 작가가 전체 이야기 틀을 유지하고, 전 시즌을 총괄하는 역할을 한다면, 그 밑에 작가들은 새내기 작가들을 두고 각 에피소드를 책임지게 된다. 전체를 총괄하는 작가들은 제작자의 지위에 오르기도 하지만, 그 밑의 작가들은 기본적으로 수당만을 받고 일을 하게 된다. 이런 다층의 구조들이 미국 텔레비전의 힘인 스토리의 다양성과 깊이를 보장해 준다.


또 다른 점은 작가들도 아이디어만 괜찮으면, 언제나 제작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들은 프로그램 아이디어를 네트워크나 제작사에 제안을 하고, 그것이 채택되면 그들이 곧 제작자가 되는 것이다. 제작자가 되면 직접 제작비를 운용하고, 감독부터 기술 스태프까지 모든 제작 구성원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니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과 기본적으로 다른 점은 한국에서는 PD 출신들이 제작자가 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 미국에서는 작가들이 제작자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프로그램 제안 과정이 개방돼 있기 때문이다. 미국 프로그램의 중흥기인 1980년대의 방송을 작가주의 텔레비전이라고 일컫는 것도 FCC 규제로 방송 독립제작이 활성화되자 많은 작가 출신의 프로듀서들이 방송사를 나와 다양한 이야기들과 제작기법들을 소개해서 새로운 시도들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작가에서 제작자가 되는 것이 감독(Director)에서 프로듀서가 되는 것만큼 용이하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재미있나, 시청자들이 좋아할 만한가, 돈이 될 만한가를 따지는 미국에서는 출신성분이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은 이렇게 작가들이 프로듀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이 네트워크와 당당히 맞설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다. 요즘 미국 기사에 일부 프로듀서들이 작가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런 작가의 힘은 일부 제작현장에서도 잘 드러난다고 한다. <베틀스타 갤럭티카(Battlestar Galactica)>라는 프로그램을 쓴 작가의 경우에는 자신은 원고만 쓰고 제작 현장에는 잘 가지 않는다고 하지만, 드라마 포맷에서는 그런 일이 흔치 않다.  

시트콤이나 코미디 부분에서 온 작가의 경우에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이들은 언제나 제작 현장에서 세세한 부분에까지 신경을 쓰고, 감독에게 조언을 하기도 하고, 필요하면 직접 연기자에게 주문을 할 정도라고 이야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감독의 경우에는 대부분 제작이 구체화되고 난 뒤에야 제작팀에 들어오게 되지만, 작가의 경우에는 프로그램이 자신의 아이디어였거나 처음 기획 부분부터 참여하고 제작자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제작 전반에 대한 작가의 이해가 더 높을 수밖에 없고 작가의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작가 노조의 존재가 이들을 다른 면에서 보호해 준다. 작가들은 새내기 시절부터 경쟁력이 쌓이고 주당 몇 시간 이상의 프로그램을 쓰게 되면, 미국작가조합(Writers’ Guild of America)에 가입할 수 있게 된다. 노조에서는 작가들의 후생 복지부터 이번처럼 단체로 작가들의 이익을 대변해주기도 한다.

이렇게 여러모로 작가들의 기반이 탄탄한 상황이니 요즘처럼 네트워크가 막강한 시대에 그들을 대상으로 싸울 힘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들의 힘은 그들의 창작력에서 나온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는 경우에만 작가들은 정규 방송을 중단시키고 네트워크를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이헌율 통신원 /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교수, nomedia@gmail.com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