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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희 MBC 라디오편성기획팀 PD

몇 해 전의 일이다. 매니아 층으로부터 제법 많은 사랑을 받아오던 심야방송 DJ가 음악활동을 이유로 방송을 그만두게 되었다. 마지막 방송을 하게 된 날, 그가 남자이고, 평소 눈물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주위에선 ‘방송중에 울진 않을 것’이라고 점을 쳤더랬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오프닝 멘트를 채 마치기도 전에 울기 시작했다. 살짝 눈물만 비친 정도가 아니라 정말 ‘꺼이 꺼이’ 울었다. 청취자들의 흐느낌도, 게시판에 가득했다.

몇 달 뒤의 일. 방송을 그만 둔 그가 데뷔 이래 가장 큰 규모로 콘서트를 열게 되었다. 수천명이 꽉찬 무대의 오프닝은 바로, 그가 마지막 방송을 하던, 그 모습을 찍은 영상이었다. 아마 그 영상을 시작으로 해서 그의 스타일대로 감상적인 곡들을 이어갈 요량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않은 반응이 나왔다. 관객들이 키득키득 웃기 시작한 것이다. 말을 흐리고 꺽꺽대는 그 모습이 우습게 보일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마치 내가 면박이라도 당한 양 스스로 무안해져 버린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바로 며칠 전에는 내가 속한 방송의 DJ들이 모두 출연하는 콘서트 행사가 하나 있었다. 전통도 있고 호응도 제일 높은 행사인데, 올해에는 특별히 TV로도 함께 방송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TV의 매체력이 함께 하니, 과정은 어떻건 꽤 좋은 기회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녹화가 시작된 후 분위기는 당혹스러웠다. 공연은 뚝뚝 끊겼고, 토크는 지루하게 이어졌다. 흐름을 따르기 보다는 사후 편집을 중요시 하는 TV 녹화방식을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초대된 청취자들도 지루해 했고 출연자들은 길어지는 대기시간에 불만을 터뜨렸다. 두 매체의 방식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라디오 방송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거, 과연 잘하는 짓일까?” 대한민국의 라디오 PD들이 맞닥뜨린 현재진행형 질문이다. 답은 아무도 모르고 현장은 심화단계다. 케이블TV에 라디오 장면을 주재료로 삼는 오락 프로그램까지 방송되고 있다. 그리고 상황은 엄혹하다. 청소년 청취층은 지금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게 감소되고 있다. 라디오 단말기는 유통되지도 않는다. 라디오의 영상화 움직임은 이런 시계제로 상황에 대한 곤혹스러운 대응임을 라디오PD들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걱정이다. 라디오만의 매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최근 라디오 방송에 복귀한 한 아나운서는 홈페이지에 인사말을 이렇게 써 놓고 있다. “옛 연인을 다시 만나듯 설레이고 긴장됩니다. 정말 돌아오고 싶었던 자리, 정말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 진심은 통한다는 말을 믿으며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그는 신입사원 시절 새벽 방송을 1년간 맡았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라디오를 떠난 4년간, 자신의 팬이 되어 항상 곁을 지켜준 사람들은 TV를 통해 만난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그 아무것도 모르던 신입사원 시절 1년간 라디오로 맺어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라디오는 마음이 담긴 매체라고 믿는다. 마음이 담길 수밖에 없는 매체라고 믿고 있다. 최근 이렇게 나 자신과 타협했다. 어쩌면 내 이후의 세대, 지금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들은 ‘보이는’ 것에서도 마음을 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잘 알지 못하는, 그런 ‘마음의 독법’을 이 어린 세대가 터득하고 있다면, 보이는 라디오가 겁날 이유는 없다. 보이는 곳에서 DJ가 울고 웃을 때, 보는 그들도 그대로 울고 웃어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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