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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CBS ‘이슈와 사람’ PD

맥라이언, 톰행크스 주연. 노라 애프론 감독, 1993년 작. 헐리웃 로맨틱 코미디 사상 최고 흥행 기록.

15년이 지나도록 대중의 뇌리에 여전히 낭만으로 남아있는 영화 ‘시애틀의 잠못 이루는 밤’. 얼굴도 모르는 두 남녀가 라디오 전화연결을 통해 서로가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는 내용으로 여전히 인기외화다. 특히 남녀 주인공이 서로 다른 고공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포스터는 영화만큼 유명하다. 그런데 S선배는 왜 9시 뉴스를 보면서 이 포스터가 생각났을까?

#1 기온이 올 들어 처음 영하권을 치던 월요일 아침 회의. S선배는 느닷없이 어젯밤 뉴스를 보다가 눈물이 흐를 뻔 했다고, ‘그 남녀’를 반드시 섭외해 보자고 한다. ‘그 남녀’란 빌딩 10층 높이 고공탑에서 보름째 홀로 시위를 하고 있는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이었다.
한 명은 뉴코아의 해고노동자로서 창전동 교통관제탑에서 시위를 하는 남성 K씨였고, 또 한 명은 코스콤의 해고 노동자로서 여의도 철탑에서 단식투쟁을 하는 여성 J씨였다.

아마도 뉴스에서는 이 두 사람의 사연이 차례로 나간 모양이다. 그걸 보고 S선배는 ‘두 사람이 통화를 하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금해졌다는 것이다. 진행자의 질문보다 더 많은 걸 담아낼 수 있을 거라며 라디오로 두 사람의 직접 통화를 주선해 보자고 제안한다. 희한한 3원 생방송이 기획됐다.

#2 “안녕하셨어요? 저 기억하시겠어요?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창전동 관제탑의 S씨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기억하고 말구요. 추운데 괜찮으신가요?” 뜻밖에도 두 사람은 첫 만남이 아니었다. 아마도 어느 해고 노동자들의 모임에서 한번 쯤 인사를 주고받은 적이 있는 모양이다. 한번 쯤 인사를 주고받은 적이 있는 ‘어색할법한’ 두 사람이 지금 같은 높이 다른 공간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갖고 있다. 통화 내내 휙휙하고 들리는 바람소리가 까페의 배경음악을 대신한다.

“저는 여성이라 화장실이 가장 어렵네요. 솔직히 배도 고프긴 해요.” “추위가 힘들긴 힘드네요. 그래도 참을만합니다.” 두 사람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그런데 가족 이야기를 묻자 이내 대화가 잠시 끊겼다. 아마도 K씨가 수화기를 떼고 눈물을 삼키고 있는 듯했다. “저는 4살배기 아이가 있습니다. 솔직히 다른 건 다 참겠는데 아이 생각이 어렵게 하네요. 머리를 비우려고 아예 사진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이 아이를 언제 만날 수 있을 지… 사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안 내려갈 생각이거든요.”

평범한 가장이자 아빠였던 K씨와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수줍음 많던 20대 여성 S씨. 두 사람 모두 비정규직으로 일하다가 하루아침에 해고 통지를 받은 노동자다. 이런 식으로 고공에 떠서 밤낮을 보내게 될지 몰랐던, ‘나는 결코 투사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평범한 우리네 이웃이다.

“J동지, 힘내세요. 땅에 내려가서 만날 수 있는 날이 곧 오겠죠.” “예, 그래야죠. 추운데 감기 조심하시구요(웃음).” 두 사람은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정작 웃을 수 없는 사람은 진행자인 나였다. 라디오로 생중계되는 그들의 대화 내내 나는 불편해 어쩔 줄을 몰랐다. 도대체 누가 저들을 10층높이 고공에 매달았는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투사로 만들었는가. IMF 10년, 쏟아지듯 양산되고 있는 그 많은 비정규직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When I fall in love… FM에서 흘러나오는 시애틀의 잠못 이루는 밤 OST. 감미로운 멜로디가 내겐 더 이상 달콤하지만은 않으리라. 시절이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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