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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 가수, MBC<여성시대>진행

|contsmark0|라디오를 통해 새긴 마음 속의 잔상들제니스라디오에 이어서 트랜지스터의 시대가 열렸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도 라디오요, 집에 와서도 책상 위의 트랜지스터를 켜는 일로 새로운 저녁을 시작했을 만큼 내겐 비중이 컸다. 중·고교시절 내게 설렘으로 다가온 모든 가수들의 노래는 소중한 라디오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 무렵 포터블 전축도 인기였는데, 소풍날 누가 전축을 가져오면 그 주변에 죽 둘러서고, 누군가 언니 오빠로부터 전수 받은 춤을 선보이면, 트위스트에서 차차차, 림보 등을 따라 배우며 즐거워했었다. 그러다가 독수리표, 별표 전축이 호마이카 칠의 번쩍이는 위용으로 세간살이 넉넉한 집 마루에 재산처럼 놓여지기 시작했다. 소리의 깊이가 영판 달라서 놀라움 그 자체였다. 쌀뒤주 옆이나 대청마루 한 가운데 놓인 그 전축들엔 죄 한 뼘 높이의 다리가 달렸는데, 그 다리 사이로는 대개가 쓰레받기나 걸레가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그 당시 프로그램 중 막둥이 구봉서 선생님이 한 곡조 하시던 시간과 김세원씨의 <밤의 플랫트홈>, <아차부인·재치부인> 등은 아직도 그리운 프로그램이다. 최동욱, 임국희, 피세영, 이종환 선생님들의 dj솜씨란! 그분들의 해설을 곁들인 팝송은 그야말로 가슴에 도장으로 진하게 새겨졌다.재수하던 가을에 ywca 청개구리 다방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노래를 부르게 됐는데 그 노래를 들은 cbs 최경식 선생님의 간청으로 팝송 3곡을 녹음했다. 그 후 애청하던 프로그램에서 내가 부른 팝송을 들었을 때는 말 그대로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71년 대학에 들어가 여름 내내 ‘아침이슬’을 취입했고, 그해 가을 내게도 <해프닝 코너>란 프로그램이 주어졌는데, 온 에어의 빨간 불빛을 입벌리고 멍하니 보면서 90초 공백이 떴고, 첫날 초대손님이었던 임문일의 재치 덕에 별탈은 없었지만 다음날로 mc가 임문일로 전격 교체되는 웃지 못할 기억이 있다. 다시 72년 봄에 <우리들>이란 청소년프로 진행을 맡으면서 cbs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72년 가을에는 동양라디오의 심야방송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맡으면서 바쁘게 다녔다. 그야말로 애청자에서 느닷없는 진행자가 된 셈인데, 그후로 통폐합이 되면서 kbs 제2fm까지 온갖 제목을 바꾸어가며 나의 20대와 라디오는 함께 갔다. 방송의 힘을 전혀 모른 채 그저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인줄 알았던 그 무지의 용기로 20대의 라디오 진행자는 승승장구했다.어느 날 남서쪽 끝 섬에서 엽서가 한 장 왔는데, 산 넘고 물 건넌 흔적이 보이는, 손을 많이 탄 엽서였다.“저는 섬에 사는 중2짜리 아무개입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섬을 질러 산너머가요. 어떤 땐 무섭지만 <우리들>을 들으면서 무서운 줄 모르고 걸어가지요. 십리 길을 매일 오가는데, 트랜지스터가 유일한 제 친구예요.”그 사연을 읽으면서 비로소 스튜디오 안의 일파가 만파도 될 수 있다는 걸 배웠고, 그 섬소년의 어두운 밤길, 책 보따리, 또 자기 몸보다 더 큰 배터리를 고무줄로 동여맨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귀에 대고 들으며 걷는 그 소년의 가슴을 생각했다. 도회지에서만 살아온 내가, 20대 초반·중반 짜리 가슴으로 내가 아는 게 다인 양하는 말들이 그 어린 가슴에는 얼마나 콱콱 들어가 도장을 새길 것인가! 그 뒤부터 어떤 그림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내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는 아니다. 누군가 어린 가슴이 내 말을 곧이곧대로 새겨들을 테니까, 그이들을 생각하자.’섬소년의 엽서가 진행자인 나를 흔들어 놓았다. 지금도 그 엽서는 기억에 생생하다.|contsmar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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