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아름다운 민족주의, 조용수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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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 사건은 2000년 10월 방송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민족일보와 조용수’ 편(연출 김환균 PD)에 잘 나타나 있다. 이에〈PD저널〉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후기를 엮은 <우리들의 현대침묵사>에 실린 ‘아름다운 민족주의 조용수’ 편을 저자의 동의를 얻어 두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6)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1961년 4월 19일, 4월 혁명 1주년을 맞아 각 대학마다 성대한 기념식이 열렸다. 이승만 독재에 대한 저항은 이제 민족의 통일 문제를 앞세운 거대한 운동으로 변화해 있었다. 서울대 민족통일연맹(약칭 ‘민통련’)은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남북한 학생회담을 제의했다. 당시 서울대 민통련 소속이었던 윤식 씨는 당시 학생들의 분위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통일 문제는 당시 젊은이라면 누구나 고민하는 문제였습니다. 서울대 민통련에서 남북한 학생회담을 제의한 것은 미래의 통일을 위해서 젊은이들이 서로 논의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죠. 물론 정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 따로 있겠지만 비정치 회담은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죠.”

  민족일보가 다른 어느 신문보다도 이런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했음은 물론이다. 다른 신문사 기자들로부터 ‘민족일보 기자는 기자가 아니라 통일투사들’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통일 운동의 진행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상황을 군부에서는 우려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후에 5 · 16 쿠데타에 주체로서 참여한 김재춘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6 · 25 때 북한에 호응했던 사람들이 다시 나타나 북한의 주장과 똑같은 주장을 공공연하게 하고 다녔어요. 이러다 큰 일 나겠다, 반공을 위해 피 흘려가며 싸웠던 우리가 막을 수밖에 없겠다…”

  역시 쿠데타의 주역으로서 1989년 작고한 이낙선 씨의 유품 중에서 발견된 메모도 군부의 당시 상황 인식이 어땠는가를 보여준다. 4 · 19 혁명을 볼 때 학생들이 민족의 등불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학생들은 현실 타개를 이제 체념한 것 같다, 혁명정치랍시고 시책하는 민주당이란 도대체가 자유당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 그의 메모는 조국이 공산화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숨기지 않았다.

  역시 쿠데타의 주역으로서 1989년 작고한 이낙선 씨의 유품 중에서 발견된 메모도 군부의 당시 상황 인식이 어땠는가를 보여준다. 4 · 19 혁명을 볼 때 학생들이 민족의 등불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학생들은 현실 타개를 이제 체념한 것 같다, 혁명정치랍시고 시책하는 민주당이란 도대체가 자유당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 그의 메모는 조국이 공산화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숨기지 않았다.

  “내 조국은 끝내 요 모양으로 있다가 공산화해야 한단 말인가… 저 북녘에서 으르렁거리는 이리떼를 잊었단 말인가… 조국아! 당신은 영영 시들려나?”

  미국도 한국에서 새롭게 일어나는 민족주의의 움직임을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당시 미국 국가안보회의가 작성한 대한정책보고서는, 세계, 특히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민족주의의 움직임이 위험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민족주의 감정이 마르크시즘, 혹은 중립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막을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정책 지침을 제시했다. 미국은 한국의 민족주의가 한국민을 미국에서 돌아서게 할지 모른다는 점을 우려했다. 소련과의 냉전 중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자유진영의 일원으로 남아 있는 한국은 여전히 커다란 전략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불과 10년 전에 피 흘려가며 지켜준 나라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때쯤 미국은 유약한 장면 정권에 대해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기밀해제된 미국의 외교 문서들은 강력한 반공 세력인 군부 쿠데타가 대안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또 군부에서 돌고 있는 쿠데타 움직임에 관한 소문들에 대해서 주목한다.

  서울대 민통련이 제안한 남북학생회담 개최안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민족자주통일중앙협회(약칭 ‘민자통’)은 이 제안을 적극 지지하면서 실천적인 통일운동의 계기로 삼고자 했다. 1961년 5월 13일, 서울운동장에서는 민자통이 주관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남북학생회담안을 지지하고 실현시키기 위한 궐기대회 성격을 띤 집회였다. 최소한 1만 명은 넘는 인파가 운집했다.

  지식인뿐만이 아니라 산동네 빈민들까지 참여한 집회의 열기는 뜨거웠다. 이 집회에 등장한 구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였다.

  그 즈음 시중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군부 쿠데타에 대한 소문이었다. 민자통 지도부도 그 소문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회를 강행한 것은 민중들의 열기를 보여줌으로써 쿠데타의 의지를 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고 한다.

  이날의 행사는 운집한 군중들의 뜨거운 열기가 말해주듯 만개한 통일 운동의 절정이었다. 또한 마지막이기도 했다. 동백꽃이 붉게 타올라 절정에 이르자마자 툭툭 져버리듯 끝은 갑작스럽고 허망했다.

▲ 혁명재판소 ⓒMBC

  (7) 3일 후의 반란

  떠돌던 소문이 현실로 닥친 것은 3일 후였다. 육군 소장 박정희가 주도한 5 · 16 군사쿠데타였다. 삽시간에 쿠데타 소식이 전해졌고 언론사는 주동자 박정희가 어떤 인물인가를 파악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민족일보도 박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박에 관해 당시 떠돈 소문은 그가 ‘민족주의자’라는 것이었다. ‘민족주의자’라는 말은 혁신계의 주장에 동조하는 인물일 거라는 섣부른 추론을 낳았다.

  5월 18일, 조용수는 어수선한 와중에 박진목씨를 만났다. 박진목씨가 기억하는 그때의 조용수는 너무도 낙관적이었다.  박진목씨는 오랜 경험으로 엄청난 회오리가 닥쳐오리라고 생각했다.

  “선배님, 군부의 민족주의자들이 드디어 일어섰습니다.”
  “섣부른 소리 말게. 자네 말이 맞더라도 일단은 몸을 피해야 하네. 며칠 지켜보다가 괜찮으면 그때는 나와도 되지만 지금은 어서 피하게.”

  박씨의 설득에 조용수는 신문사에 가서 간단한 뒷마무리만 해놓고 오겠다고 했다. 박씨는 약속한 다방에서 기다렸으나 돌아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조용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신문사에 전화해 보니 여직원이 ‘어떤 사람들이 와서 사장님을 모시고 갔다’고 했다.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조용수가 끌려간 지 나흘 후였다. 치안국은 ‘조용수 일당의 죄상과 배후관계’라는 제목으로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조총련으로부터 1억 환의 자금을 불법으로 들여와 민족일보를 발간했으며, 북한에 적극 동조해 왔다는 것이 요지였다.

  화로 속에 숨어있던 불씨가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7월 29일, 혁명경찰국이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는 일본 거주 대남간첩 이영근과 접선하여 공작금을 받아 윤길중, 서상일, 고정훈, 최근우 등 국내 혁신계 인사들과 활동하면서 민족일보를 창간, 북한의 주장을 대변하는 언론활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같은 날, 혁명재판소 법정에서 공판이 시작되었다. 검찰의 공소 내용은 혁명 경찰국의 ‘전모’와 같은 것이었다. 조용수는 일본에 거주 중인 대남 간첩 이영근과 수시로 접촉했으며, 이영근이 국내 정세가 혼란한 틈을 타, 혁신계를 통합하고 신문을 창간할 것을 조용수에게 지시했고 공작비 지원도 약속했다는 것이다.

  이영근이 간첩죄로 기소된 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1심 판결은 무죄였다. 그가 일본으로 간 것은 조봉암이 결국 사형 당한 진보당 사건이 터지면서 망명한 것이었다. 일본에 체류하면서 이영근은 그가 발행인으로 있던 통일조선신문을 통해 평화통일론을 펼치고 있었다. 같은 민족끼리 또 한 번 피를 흘리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통일은 평화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영근은 나중에, 북한이 세습체제를 구축하면서 평화통일론을 버리고 무력 적화통일론으로 돌아서자 즉각 북한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 이후로도 그는 평화통일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1990년 이영근이 사망했을 때 우리 정부는 대한민국을 위해 일한 그의 공로를 인정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훈장 수여증명원에 기록된 이영근의 공적은 ‘민족지 통일일보를 창간, 대조총련 투쟁과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 향상에’ 기여한 것이었다. 간첩에게 대한민국 정부가 훈장을 준 것인가, 아니면 간첩이라는 주장이 애초에 잘못된 것인가.

  단 하나, 자금이 이영근으로부터 조용수에게 전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취재 중에 만난 민단 관계자는 그 자금은 박용구 등 민단계 사업가로부터 나온 것이며 총련과는 관계가 없다고 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으로 간 박용구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부동산에 투자해 거부가 된 사람이었다. 이영근을 만나면서 민족을 위해 뭔가 뜻있는 일을 하고 싶다며 자금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박용구는 후일 박정희 측으로부터 공화당의 재정국장 자리를 제안받기도 했던 인물이다.

  혁명재판은 혁명적으로 진행되었고 혁명적인 결론으로 치달아 갔다. 유죄의 증거는 없지만 그렇다고 유죄가 아닌 것은 아닌 이상한 재판이 혁명재판이었다. 이영근이 간첩이라는 것과 조총련계 자금이었다는 것에 대해 어떤 증거도 제시되지 않았지만 조용수는 ‘용공분자’라는 혐의를 벗을 수 없었다. 

  검찰이 최종적으로 문제 삼은 것은 민족일보의 논지였다. ‘민족일보가 북한의 지령을 받아 평화통일론을 선전하는 데 앞장섰고, 남북한 교류와 학생회담 개최를 찬동함으로써 북한괴뢰집단의 활동을 고무, 동조했다’는 것이 검찰 측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조용수는 혁신 세력은 기본적으로 의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라고 반박하며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들을 증거로 제시했다. 그 중에는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 통일안에 대한 비판과, 국민의 자유를 박탈하는 김일성의 독재정치에 대한 강한 비난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조용수가 북송반대 시위에 나선 대한뉴스의 화면이 증거로 제시되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심에서 사형, 상고심에서 원심대로 사형 확정.
  그걸로 끝이었다. 12월 21일, 화로의 불씨는 거대한 화염이 되어 끝내 젊은 목숨을 그의 꿈과 함께 삼켜버렸다.

▲ 재판장의 조용수 (맨 왼쪽) ⓒ MBC

 (8) 조각그림 맞추기

  언론사 사장의 사형, 그것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도 유례가 없었던 일이었다. 사형 판결이 내려졌을 때, 국제신문인협회(IPI), 국제펜클럽(PEN) 등 국제 언론 단체들은 항의성명을 내면서 구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왜 그런 국제 여론도 무시한 채 언론사 사장을 처형해야만 했을까? 그것도 증거조차 불충분한 용공 혐의로 말이다. 조용수의 처형은 5 · 16 쿠데타가 낳은 숱한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이다.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몇 가지 조각그림들을 맞춰볼 필요가 있다.

  조각그림 1) 정권 장악보다 급했던 용공분자 색출
  군사혁명사에 기록된 5월 16일 당일의 상황은 이상한 구석이 있다. 쿠데타 세력이 가장 역점을 둬야할 정권 장악은 16일 오후에 시작된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착수한 일이 있었다. 용공분자 색출을 지시한 것이다. 오전 8시 30분이었다.
  왜 정권 장악보다 용공분자 색출이 더 급한 일이었을까?
 
  조각그림 2) 깎여나간 민국일보
  쿠데타 하루 뒤, 민국일보는 사진이 모두 깎여진 채 발행되었다. 사정은 이랬다.
  쿠데타의 주역이 박정희 소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당시 민국일보 사회부장은 박의 사진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으나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방 주재기자에게 급히 연락해 고향 경북 선산으로 찾아가 가족들 사진이라도 찍어 보내라고 지시했다.

 궁여지책이었지만 보내온 사진은 특종감이었다. 박정희의 형 박동희가 풀지게를 지고 초막 농가로 들어오는 장면이었다. ‘이제 군사혁명위원회의 혁명정무를 맡아 그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게’(민국일보, 1961년 5월 17일 3면) 된 지도자의 형치고는 너무도 소박한 모습이었다. 이혜복은 이 감동적인 사진을 기사 중에 삽입하도록 했다.

  “그런데 검열관들이 사진을 다 깎아버리는 거예요. 이런 거 나가면 공산 쿠데타로 의심받는다면서 말예요.”
  무슨 말인가? 청렴하다는 것을 과시할 수 있는 생가인 초막 농가와 풀지게 진 형의 사진을 감추려 한 것은 무산자, 즉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보일까 우려했다는 것이다.

  조각그림 3) ‘적색 쿠데타’에 대한 변명  
  “당시 ‘적색 쿠데타’라는 소문이 파다했었죠. 박정희는 이승만 정부에서 국방부장관을 지냈던 김정렬을 통해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미국측에 변명하러 다닌 것을 내가 직접 봤어요.”(선우종원)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벗으려면 혁신 세력을 쳐야겠다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이만섭)
 
  박정희가 그토록 두려워 한 것은 자신의 좌익 전력이 아니었을까. 1948년 여수 14연대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박정희는 군대 내 남로당 총책으로서 수사를 받았던 적이 있다. 그는 군 수사기관에 공산당의 조직체계를 고스란히 제공했다. 반란이 진압된 후 벌어진 군내 숙정과정에서 4,700여 명이 처벌되었지만 남로당 총책이라는 중책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좌익 전력은 그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조각그림 4) 이석제의 획기적인 프로그램
  5 · 16 주체이며,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사위원장이었던 이석제는 결정적인 조각그림을 제시한다. 월간조선에 연재된 회고록에서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미국이 혁명지도자 박정희 장군과 김종필 예비역 중령의 배경을 뒷조사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미국의 사상공세를 일거에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비상한 조치가 필요했다. 미국측에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보여줘야만 혁명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 좌익 사상범들을 체포하자.’”

  이 획기적인 프로그램은 박정희를 구제해 주었다. 그 해 11월, 박정희는 미국을 방문했고, 백악관으로부터 군사정권에 대한 지지를 얻어냈다. 사상 전향을 확인받은 박정희는 미국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가진 연설에서 쿠데타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자신이 확고한 반공주의자임을 힘주어 강조했다.
  “위험천만한 것은 북한과의 협상론이었습니다. 어떤 좌익 분자들은 경제협정과 유엔군 주둔 반대시위까지 했습니다.”

  (9) 32살의 영원한 청년

  12월 21일, 사형수 다섯 명 중 마지막으로 교수대에 오른 조용수는 짤막한 유언을 남겼다.
  “민족을 위해서 좀더 일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쉽다. 신문사를 운영하느라 친구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우리가 취재를 위해 유족인 조용준씨로부터 건네받은 것은 크지 않은 상자 하나였다. 청년 조용수의 32살 생애는 겨우 상자 하나밖에는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짧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4월 혁명 이후 자유의 시기에 피워 올린 민족주의의 열망과 통일에 대한 열정은 무게를 잴 수 없는 것이다. 조용수는 그 이전에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뚜벅뚜벅 걸어갔다. 어쩌면 당시 현실로서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상주의자의 길이었는지 모른다.

  상자 속에는 조용수의 혼이 담긴 민족일보가 창간호부터 차곡차곡 모아져 있었다. 겨우 지령 92호. 그 마지막 신문에 누군가가 이렇게 적어 놓았다.

  ‘민족일보 라스트 신.’
  그것이 정말 끝이었을까?  

조용수의 처형은 곧 혁신계의 처형이자 평화통일론의 처형이었다. 평화통일론은 그 후 8 · 15 선언이 나오기까지 1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민족일보가 주장했던 ‘올림픽 단일팀 구성’과 ‘단일기’는 이후의 역사에서 그대로 실현되었다. 그가 꿈꾸었던 대로 남북정상이 만나 악수도 나눴다.

이렇듯 역사는 때로 무덤 속으로 사라진 이를 부활시킨다. 얼치기가 아닌 진정한 민족주의자들에게, 통일을 꿈꾸는 자들에게, 평화한 세상을 꿈꾸는 자들에게, 32살에 죽은 조용수는 여전히 32살의 청년으로 살아 있다. 

MBC 시사교양국 PD
87년 MBC에 입사해 <인간시대>, 특집다큐멘터리 <체르노빌 그 후 10년>, <세계의 병원 5부작>을 거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미국> 등을 연출했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기획을 맡았으며 20대 한국PD연합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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