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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노브코비치와 안성기

|contsmark0|통합방송법을 둘러싼 대치가 계속되는 이즈음의 방송가는 답답하기만 하다. 평생 여당할 줄 아는지 방송위원회 구성에서 집권여당의 프리미엄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국민회의의 오만은 우리를 분노케 한다. 법체계상의 문제나 다른 나라의 유례가 없음을 애써 들면서 인사청문회나 편성위원회가 불가함만을 강변하는 모습은 이들이 불과 얼마전까지 야당이었으며, 보수여당의 적폐를 척결하기 위해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던 바로 그 사람들인지를 의심하게 만든다.이 와중에 반사이익이나 챙기려는 한나라당에 대한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kbs 예결산권이나 mbc 공적 기여금 문제에 목청을 높이며 방송길들이기를 지적하고 노조의 일부 주장에 동조해 그 덕택(?)으로 방송뉴스의 한 귀퉁이를 장식하는 모습은 그들이 집권 당시에 방송장악을 위해 어떤 행태를 보였는지를 떠올리게 해 입맛이 쓰다. 무얼 믿고 다음 선거에서의 승리를 확신하는지는 모르지만 야당의 입장에서 오히려 도움이 될 법도 한 편성위원회에 관해 수구적인 자세를 보이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이들이 과연 야당인지 혼란스럽다.이런저런 짜증나는 소식이 많은 이즈음에 귀를 번쩍하게 하는 뉴스가 있다. 최근 유고에 밀로셰비치 사임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가 전개되고 있는데 이러한 사태는 한 용기있는 방송엔지니어가 생방송 농구중계 중에 반정부 연설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촉발됐다는 것이다. 상보(詳報)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지난 7월 5일 세르비아의 남부도시 레스코바치에서 유러피안배 농구 준준결승으로 유고와 독일간의 경기가 열렸다. 그런데 이 경기의 중계방송 도중 지역방송 엔지니어 이반 노브코비치(34)라는 남자가 10분 남짓 tv송출기를 끊고 반정부연설을 했다고 한다. “당국이 수많은 청년들을 징집, 코소보로 끌고가 개죽음을 당하게 했다. 밀로셰비치가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당국이 코소보 주둔 세르비아군의 피해상황을 축소 발표했다.” 떨리긴 했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노브코비치가 연설을 방송하자 시민들은 들끓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시위대가 길거리로 뛰쳐 나왔고 그 수는 3만여명으로 불어났다. 그의 연설은 그동안 억눌려 있던 시민들에 불을 지폈고 마침내 “밀로셰비치 물러나라”는 반정부 구호로 이어졌다.그 후 노브코비치는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이튿날로 경찰에 체포됐다. 당국은 그에게 시위 선동죄를 적용해 1개월 징역형을 내렸다. 체포 당시 그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평가는 역사가 해줄 것이다.”며 담담히 말했다고 한다. 그의 체포소식이 알려지자 시위대는 더욱 분노했고 베오그라드 남서부 등으로 밀로셰비치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급속히 번져 나가고 있다고 한다…. (이상 중앙일보 7월 9일자 기사에서 발췌)지구촌 저쪽에서 전해오는 소식 치고는 너무도 생생하고 감동적이다. 이 시위 사태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오랜 굴절의 역사를 살아온 한국 방송인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사태가 여기에 이르기까지 세르비아의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해왔을 것이라는 점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아마도 권력의 언론 장악으로 인해 혹은 소아적인 국익에 눈멀어 공정보도를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브코비치는 모름지기 진실은 일시적으로 억눌려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분출하고야 만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의 용기는 직종을 뛰어넘어 공정방송을 위한 방송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시사해준다. 수년 전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감독 강우석/박근형, 신성일 ,안성기, 김성령 등 출연)라는 한국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었다. 짧은 이 글에서 영화의 세세한 줄거리는 생략하거니와 거칠게 말해 대통령선거 과정에서의 음모를 다룬 영화다. 그런데 방송인의 입장에서 그 영화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마지막 장면 때문이다. 유력 대통령 후보와 내연의 관계인 방송사 앵커의 죽음을 추적하던 방송사 기자(안성기 분)는 온갖 압력에도 불구하고 극비리에 취재를 계속한다. 그리고 상사들에게는 다른 아이템으로 방송하는 것처럼 안심시킨 뒤 생방송 도중 대통령 후보 비리 내용을 전격적으로 방송하기 시작한다. 진압부대가 즉각 출동하고 방송사는 일촉즉발의 위기에 휩싸인다. 감동적인 것은 그 다음이다. 방송사내에 있던 모든 직원들이 일제히 인간 방벽을 만드는 것이다….정치적 외압과 방송사 조직 내에서의 통제로 인해 공정보도를 위한 일체의 기도가 차단된 상황에서 나왔을 노브코비치의 행동과 ‘누가 용의 발톱을…’에서의 기자 안성기의 행위에는 유사한 점이 많다. 합법적 공간에서 공정방송과 언론자유를 추구하는 노력이 좌절되고 억압될 경우 마침내 ‘옥쇄’를 각오한 개인의 초법적 영웅적 투쟁에 의해서 역사의 새로운 단계가 펼쳐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들은 일깨워 준다. 다시 방송법 얘기로 돌아오자. 방송위원회 구성 방식도, 방송위원과 공영방송사 사장의 인사 검증장치도, 그리고 편성위원회마저도 봉쇄되면 우리 방송은 독립성의 측면에서 권위주의 시절의 그것에 비해 결코 달라지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경우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 방송은 한국의 이반 노브코비치와 진짜 안성기를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작금 기를 쓰고 ‘방송개혁’을 저지하고 있는 정부 여당은 필경 그런 사태를 원하는 것만 같다.<본보 발행인>|contsmar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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