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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균MBC 교양제작국 PD

|contsmark0|새로운 세기를 앞둔 지금 컴퓨터와 인터넷이 세계인의 화두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컴퓨터가 만들어내는 네트워크 세계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발명이다. 코소보 전쟁에서 보듯, 인명 살상을 목적으로 한 대규모의 공방이 계속되는 동안 다른 전쟁이 동시에 진행된다. 인터넷 전쟁이다. 컴퓨터를 극찬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민주주의는 인터넷에 의해 달성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사명감에 불타고 자존심 강한 언론인들에게는 몹시 불쾌하고 불길한 예언도 오래 전부터 떠돈다. 그 예언은 ‘인터넷은 언론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정보를 장악하는 자가 권력을 장악한다는 예언은 이미 오래 전에 성취되었다. 컴퓨터가 심어주는 낙관적인 모든 전망은 본질적으로 인간 존재의, 또 인간 관계의 확장으로 요약된다. 자기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에 의해 경험을 제약받는 자연적인 인간과는 달리, 컴퓨터와 네트워크에 의해 확장된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컴퓨터와 인터넷이 인간의 삶의 질을 현저하게 개선시켜 줄 것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확신에 찬 전망에도 불구하고, 함정은 있다.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효율을 떨어뜨리며 비인간적인 조건을 강요할 위험이 그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컴퓨터와 인터넷이 주요하게는 커뮤니케이션을 용이하게 하면서, 또 그것을 가로막는 역설적인 도구라는 점이다.참고할 만한 두 편의 글이 있다. 하나는 움베르토 에코의 에세이이고, 다른 하나는 최영미의 시 한 편이다.몇 년 전에 국내에 번역된 움베르토 에코의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 중 동일한 제목의 글은 컴퓨터가 인간에게 가하는 억압을 우화적으로 이야기한다. 영국에 여행간 그는 훈제 연어 한 마리를 사 별 다섯 개 짜리 호텔에 묵는다. 최근에 컴퓨터 시설을 한 호텔이었다. 연어가 상하지 않게 객실의 냉장고에 넣어야 하는데, 냉장고는 각종 음료로 가득 차있다. 연어를 집어넣기 위해서는 음료를 몇 개 꺼내야 했다. 다음날 호텔에 돌아와 보니 연어는 식탁에 드러누워 있고 냉장고는 다시 채워져 있었다. 이 사태에 대해 해명하려 애쓰지만 다음날 같은 일이 또 반복된다. 연어는 이미 썩어버리고 그는 엄청난 청구서를 받는다. 해명하느라 애를 쓰지만, 직원은 컴퓨터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 틀림없다고 단정한다. 애드버키트(변호사)를 불러달라고 하자, 열대 과일 아보카도를 한 알 가져다 준다.13년 전에 씌어진 이 글은 어쩌면 극단적인 예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전혀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인 것은 아니다. 비근한 예로 y2k 문제만 보아도 아직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니 말이다. 물론 에코가 이 이야기를 통해 꼬집으려 했던 것은, 컴퓨터가 야기할지도 모르는 위기나 재앙이 아니라, 컴퓨터 맹신이 가져다 준 소통 불능 상태이다. 가장 원시적인, 가장 본질적인 소통의 방식인 얼굴 맞대고 이야기하기가 신뢰받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정신의학자들은 유년시절부터 컴퓨터, 즉 사이버 세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을 잘 해결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갈등에 직면한 그들이 취하는 행동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반사회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들거나, 문제를 회피해 버리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인간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가 돌아가는 곳은 사이버 세계이다.최영미의 시는 어쩌면 에코보다 훨씬 통렬하다. 컴퓨터와 섹스하고 싶다고 그는 중얼거린다.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그의 시는 매우 반어적으로 읽힌다. 그러나 에코가 소통 불능, 혹은 소통의 부재를 지적했다면, 최영미 시의 화자는 소통을 거부하고 인간을 거부한다. 인간과 인간의 대면에는 필연적으로 오해와 갈등이 있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내가 명령하는 대로 움직여주고 거부하는 법이 없는 컴퓨터는 갑자기 그런 노력이 매우 번거롭고 귀찮은 일임을 일깨워준다. 그래서 가장 인간적인 욕망 중의 하나인 섹스조차도 인간이 아닌 컴퓨터와 하고 싶다고 중얼거리고 만다. 인간의 본래의 소통 방식은 얼굴을 맞대고 하는 이야기의 형태였다. 글씨는 그 다음 몇 단계 후의 형태일 것이다. 이런 소통의 방식에는 요즘의 컴퓨터로 하는 효율성을 추구하는 소통보다는 훨씬 더 풍부하고 진지한, 그리고 인간적인 정보들이 많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 거기에는 인간이 끊임없이 개입된다.필자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두 번 육필이 주는 감동을 경험한 적이 있다. 한번은 윤동주의 육필 시고(詩稿)였고, 한번은 백범 김구의 ‘백범일지’ 원본이었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에 기록된 글이 감동적이었던 것은 그들의 필체 때문만은 분명 아니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것, 그 글을 쓰는 동안에 그들의 영혼을 스쳐 지나갔을 많은 느낌들이 나에게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최근 한 출판사에서 김춘수, 신경림, 정현종 시인 등의 시작품을 시인들의 육필로 출판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컴퓨터로 글쓰기에 익숙해진 이 시대에 무슨 시대 착오적인 발상이냐고 꾸짖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이 시대의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대해 신선한 충격을 가하리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랬으면 하고 바란다. 효율성을 추구하되 진지한, 인간이 끝까지 견지된 소통의 방식, 그것이 꿈만은 아닐 것이다.|contsmar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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