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화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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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길화 칼럼
PD정신의 위기
  • 승인 1999.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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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pd는 저널리스트인가 아티스트인가. pd는 문화의 생산자인가 매개자인가. pd는 방송사 내에서 주류인가 아닌가. pd는 장사꾼인가 시인인가 혹은 공무원인가. 아니 다른 것은 고사하고 하나의 직업정신으로서 pd정신은 있는가…. 아마 밤을 새워도 모자랄 우리네 정체성에 관한 화두들이다. 모름지기 pd라면 적어도 한번쯤 이 같은 담론으로 호프집에서 포장마차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선후배 동료들과 격론의 자리를 보내지 않은 이가 없으리라.그러나 최근 들어 이러한 열띤 토론을 가졌다는 얘기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갈수록 열악해지는 방송환경 속에서 선후배 관계는 단절되고 있다. 따뜻한 격려와 엄한 질책,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경의나 진솔한 충언은 사라지고 형식적인 공치사나 냉소만이 그 빈 자리를 메운다. 아마도 이마저도 얼마 안가 없어질 것만 같다. 선배와 동료들은 이미 잠재적 경쟁의 상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혹시라도 시청률 경쟁에서 뒤질까 다들 전전긍긍이다. 그러다 보니 주요 출연자의 배타적 섭외를 위해, 유리한 시설배정과 인력 확보를 위해, 안정적인 제작비 확보를 위해, 선후배 동료들과 안면몰수하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필자가 궁금한 것은 이것이 방송계의 어떤 특별한 사정 때문에 우리들 프로듀서에게만 유달리 심하게 나타나는 현상인지 아니면 최근의 우리 시대에 만연한 하나의 문명사적 추세의 탓인지 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런데 만약 전자라면 그것은 참으로 답답한 얘기가 된다. 한정된 재원을 사용하는 프로그램 제작과정에서 어느 한 pd가 제작비를 많이 쓰면 다른 pd에게는 상대적 불리함으로 나타난다. 선배는 하늘과 같다며 양보하다가는 시쳇말로 물을 먹기 십상이다. 어려운 아이템, 힘든 조건을 후배가 또는 선배가 껴안는 어제의 미덕은 내일을 모르는 우리 방송 풍토에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당장 눈앞의 기회는 어떻게든 차지하고 볼 일이다.충심으로 충고해주는 선배도 없지만 그런 충고가 설사 있다 해도 그 충정이 곧이곧대로 먹히지도 않는다. 어떤 의도를 갖고 하는 말이거나 그도 아니면 떠오르는 후배를 견제하는 말로 들린다. 어떤 중견 프로듀서는 종전의 도제식 선후배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프로그램 제작에서의 ‘사범(師範)’이 실종됐고 그 이후에 일본 방송 프로그램의 베끼기가 기승을 떨치게 됐다는 분석을 하기도 한다. 모두 ‘대가(大家)’가 되었고 다들 엄혹한 시청률 경쟁에 지배돼 눈에 불을 켜고 프로그램을 만들 뿐이다.경쟁 풍토는 특정 회사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가히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바뀐다. 거의 약육강식의 수준이다. 어떤 연예인은 녹화과정에서 상습적으로 시간 약속을 어기고 프로듀서의 정당한 업무수행을 위한 각종 조치를 무시한다. 인기 절정에 시청률 보증수표라는 것 때문에 담당 프로듀서는 모든 것을 참는다. 그러다 인내의 한계를 벗어나는 월권이 벌어지고 마침내 누적됐던 갈등이 분출한다. 이 정도면 범사적이고도 범프로듀서적인 대책이 나올 법도 하건만 며칠 지나지 않아 그가 경쟁사의 동시간대 프로그램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알고 보니 이미 그를 스카우트하려 상대사의 프로듀서가 ‘모반’을 사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쯤되면 하나의 직업인으로서 pd들에게 의식이 있는지 자존심이 있는지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잊을 만하면 나오는 표절 모방 시비만 해도 그렇다. 인적 투자나 프로그램 소프트웨어에 대한 연구개발은 없이 시청률이란 결과만을 추구하는 우리 방송 풍토에서 모방은 얼마간 피할 수 없는 구조적인 측면도 있다. 하지만 벤치마킹 수준을 지나 일본 프로그램과 자막 처리까지 똑같이 하는 경우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소위 프로듀서로서 우리에게 직업을 관통하는 윤리나 정신이 있기나 한가에 대한 고민 때문에.흔히 pd는 작품으로 승부하고 프로그램으로 말한다고 한다. 그 말은 옳다. 하지만 그 결과 pd들이 하나같이 프로그램에 매몰돼 세상을 잊고 동질감도 잃고 파편화된다면 이제는 그 말도 다시 생각할 때가 됐다. 그 와중에 pd라는 직종의 아이덴티티만 훼손되고 있다. 무분별하고 소모적인 경쟁으로 방송의 매체력이 저하돼 결과적으로 특정 직종이나 특정 매체의 패권주의적 기득권을 온존시키고 확대한다면 진정 우리가 하고 있는 경쟁의 일그러진 본질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방송의 날을 앞둔 이 시점, 정녕 방송의 전위에 선 pd들이 진정으로 책임있는 자세를 보이기 위해서 pd정신을 다시금 되짚어봐야 할 때다. 이 땅의 pd들이 프로그램을 찍어내는 단순한 기능인으로 전락해버린 채 숭고한 직업정신을 온몸으로 구현하지 못할 경우 종당에 우리 직종은 비참한 퇴출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contsmark1|<본보 발행인>|contsmark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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