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상태바
시평
방송 프로그램 속의 성차별배금자한국 및 미국 뉴욕주 변호사
  • 승인 1999.09.0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contsmark0|우리나라 방송사의 뉴스나 토크쇼 진행자의 역할과 자리배치에 관하여 불문율 비슷한 것이 있다. 남자와 여자가 공동 진행할 때 여자를 ‘왼쪽’에 앉히고, 남자에게 ‘리드 역할’을 맡기는 것이다. 가장 심한 예가 텔레비전의 저녁 뉴스 진행이다. 정치적 뉴스가 많은 날은 남자 앵커가 혼자서 약 30분간 진행한 다음에 여자앵커가 등장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구도는 의도적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관례에 따라 별다른 생각 없이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의도적이든 관례든 이런 구도자체는 여성에 대한 심각한 차별이며, 유교문화의 잔재로 성차별 의식이 강한 이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적 고정관념을 심화시키는데 매우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큰 문제다. 이런 구도를 재생산하는 방송 제작진에게 문제가 있지만, 남성중심의 구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남자로서의 우월적 지위에 안주하는 남성 진행자나 차별적 구도를 감수하면서 ‘이의제기 없이’ 방송 진행을 담당하는 여성 진행자에게도 문제가 많다. 또한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국민들의 의식수준도 물론 큰 문제다.남녀가 공동 진행할 때 남성에게 리드 역할을 맡기는 것은 남성의 능력이 월등하고, 여성은 남성의 보조자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9시 뉴스 구도의 경우 주요 뉴스를 남자앵커가 맡고, 여성은 ‘반드시’ 그 다음에 나와 비중이 떨어진 역할을 맡을 때, 또 시사토론 프로그램에서 진행자는 중후한, 경력이 풍부해 보이는 남성이 맡고, 여성은 젊고 경력도 짧은 여성이 그 옆에서 노트북을 켜놓고 시청자 조사를 받는 역할을 맡아 ‘꽃’의 역할을 할 때, 시청자들에게 무의식으로 심어주는 영향이 어떤 것일지 생각해 보라.자리에 있어 여성을 ‘반드시’ 왼쪽에 배치하는 것이 성차별이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유교문화에 있어서 ‘좌’는 ‘우’에 비해 열등하고, 강등된 자리로 인정되었다. 왼쪽으로 자리를 옮긴다는 뜻의 ‘좌천’은 강등된 것을 의미하고, ‘좌도’는 정도를 의미하는 ‘우도’와 반대되는 뜻으로, 정도가 아닌 길을 뜻한다. 이처럼 유교문화에 있어서 왼쪽 자리가 의미하는 열등성을 남녀 공동진행 프로그램에서 여성에게 왼쪽 자리를 고집함으로써 여성을 ‘열등한 존재’임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들은, 특히 9시 뉴스 진행구도에서 진행의 역할 비중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나는 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이 많았다. 자리 배치를 눈여겨보지 않기 때문에 이런 불문율과 배경에 깔린 의미를 알아채기 힘들다. 그러나 지금부터 눈여겨 보라. 하나같이 여자가 왼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미국의 cnn같은 케이블 방송이나 abc, nbc 등 공중파 방송을 시청하는 가구가 많다. 이런 방송에서는 여성이 단독 진행하는 경우가 많고, 공동진행의 경우에도 남성과 여성은 번갈아 가면서 평등한 역할을 맡고 있고, 남자가 왼쪽에 앉는 경우도 많다. ‘남자가 리드역할’, ‘여자는 왼쪽에 앉기’라는 등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도 우리만큼 심하지 않다. 유럽은 물론이고 동남아시아도 이렇지 않다. 미국에서 방송사의 성차별 소송은 다른 영역에서의 성차별 소송에 비해 많지 않은 편이지만, 이런 형태의 것과 싸울 일은 전혀 없다. 이런 구도가 있다면 이것은 명백히 시민권법 ‘타이틀 세븐’이 금하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 취급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미국에선 외형상 명백한 성차별은 수십년 간의 소송 투쟁으로 거의 사라졌으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성차별 소송은 ‘성 역할 고정관념’을 몰아내기 위한 차별방지소송이다.뉴스앵커의 능력은 뉴스를 정확하고, 공정한 태도로 신뢰성 있게 전달하는 데 있고, 토론 진행자의 능력은 공정하고 중립적 태도, 그리고 예리한 관찰력과 분석력으로 토론을 이끌어가서 최선의 결론을 이끌어내는데 있다. 여성의 미모나 젊음은 이러한 능력과 하등 관계가 없다. 여성앵커나 진행자도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여성을 배치하여 공동진행에 있어서 평등한 역할을 맡기거나 단독 진행을 맡기면 이런 역할을 오히려 더 잘 해낼 수 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의식조사를 해보라. 이제 여자도 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일하는 능력, 당당함, 경륜을 높게 평가해야 한다는 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다. 그런데도 이런 구도를 고집하는 방송 제작진들은 가장 뒤떨어진 국민들의 낡아빠진 의식에 영합하면서,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 된다. 이 나라 여성을 더 이상 모독하지 말라. 고학력의 여성들이 수두룩하고 선진국 진입을 위해 노력하는 이 나라에서, 여성권한 척도가 102개 나라 중 83위를 차지하는 현실은 끊임없이 여성을 보조적 존재로 각인시키는 이러한 방송구도가 미친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여성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21세기 지식사회를 눈앞에 두고, 더 이상 이 땅의 여성을 열등적 위치에 묶어두는 낡은 의식과 행태를 하루 빨리 몰아내어야 할 것이다.
|contsmark1|※ 본 시평의 의견은 연합회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contsmark2||contsmark3|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