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화다양성협약’의 졸속비준 시도, 누구를 위한 것인가?
상태바
[기고]‘문화다양성협약’의 졸속비준 시도, 누구를 위한 것인가?
  • 세계문화기구를 위한 연대회의 집행위원장 양기환
  • 승인 2007.10.31 15: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계문화기구를 위한 연대회의 집행위원장 양기환

지난 17일 평온하기만 하던 오후, 우리는 한나라당 정병국 의원실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 하나를 전해 들었다. 정부가 유네스코 ‘문화다양성협약’의 주요 조항을 유보한 채, 대통령 비준만으로 협약을 통과시키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것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발표되어 뒤통수를 맞았던 작년의 스크린쿼터 축소발표나 한미FTA에서 방송시장 개방발표 때가 생각났다.

이처럼 너무나 중요한 정책결정을 정작 관련된 당사자와는 아무런 논의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결정된 정책이니 따르시오”라고 발표하는 것이 참여정부를 표방하는 현재의 노무현 정권이다. 이런 결정방식이야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것이 되어버렸지만, 협약과 관련한 정부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문화다양성협약’이 무엇인가? 순수 기초예술 분야를 포함하여 산업적으로 발달한 방송·영화·음반 등 시청각 분야에 이르기까지 시민사회의 참여를 보장하면서 정부의 획기적인 지원과 보호증진을 의무화하고 있는 협약이 아닌가? 그리고 2005년 10월, 미국과 이스라엘만이 반대하여 사실상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던 한국도 찬성했던 협약이 아닌가? 협약은 이미 69개국에서 비준 기탁을 완료했고, 올해 3월18일부로 국제법으로 발효되었으며, 6월엔 구체적인 실행방향을 논의하기 위한 당사국회의가 열려, 정부간위원회까지 구성되었다.

국제사회의 그런 움직임에 발맞추어 한국의 문화예술계 역시 2년째 한국정부에 계속해서 협약비준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한국정부의 반응은 외교통상부 관료가 토론회에 나와서 했던 “신중하게 추진하고 있다”라는 말 한 마디뿐. 우리 국민의 삶에 훨씬 심각하게 영향을 주고 많은 논란이 있어 더 신중하게 판단되어야 할 한미FTA의 비준동의안을 5개월 만에 제출한 정부가 당연히 해야 할 ‘문화다양성협약’에 대해서는 2년 이상 서랍에 두고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2년을 방치하다, 꼼수를 부리던 정부의 움직임이 지난 17일 포착된 것이다. 우리는 외교통상부가 협약의 비준과 관련해 법제처에 법적의뢰를 맡기고자 했던 공문을 입수할 수 있었고, 공문은 협약의 핵심조항인 20조를 유보, 25조를 승인하지 않음을 선언하여, 국회 비준 없이 대통령 비준만으로 통과시키겠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그 내용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먼저 협약20조는 다른 조약과의 관계에서 ‘상호지원성, 보완성 및 비종속성’이라는 3대 원칙의 실현을 통해 다른 조약을 체결할 때 문화 분야에서만큼은 협약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함을 규정한 핵심조항으로 이를 유보하겠다는 것은 국제법의 지위를 가지는 문화다양성협약의 의미를 훼손하고 사실상의 선언수준으로만 받아들이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편, 25조는 당사국간의 분쟁 해결에 관한 조항인데, 비록 협약에서 이를 승인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규정하고 있지만, 한미FTA에서는 ‘투자자-정부 중재제도’를 인정했던 걸 고려할 때, 역시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이처럼 20조를 유보하고 25조의 불승인을 선언한 채 비준한다면, 이미 비준을 완료한 69개국 중 2개 이상의 조항을 유보한 유일한 국가로서 국제사회의 조롱의 대상이 될 것이다. 또한 이처럼 중요한 협약을 대통령 비준만으로 처리하겠다는 것에서는 “내가 옳으니 국민은 따라오라”는 노무현 정권 특유의 독선과 오만방자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그렇다면 왜 한국정부는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결정들을 하는 것일까? 한국은 협약 체결전인 2005년 6월, 국제사회의 요구를 뒤로한 채 문화다양성협약과 관련한 WTO 일부 국가들의 비공식회의에 참여해 미국과 함께 협약을 강력 비판했으며, 협약 채택 직후엔 미국과 함께 협약 채택에 대해 유감의 연설을 했으며, 외교통상부는 협약에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서까지 발표했다. 그리고 논외지만 최근엔 이라크전쟁 파병기간을 연장하기도 했다. 아무리 미국 우방이라지만, 이처럼 국민의 뜻을 저버리고, 국익을 포기하며 국제사회의 시선까지도 무시한 채 미국정부의 입장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 현재 한국정부이기에 이 모든 것이 이해되고, 가능한 일인 듯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