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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11월 5일에 있었던 김용철씨의 삼성 비자금 관련의 기자 회견장은 빽빽하게 들어선 수백명의 기자들의 취재 경쟁으로 아비규환에 가까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한 기자의 푸념이 걸작이었다고 한다. “이렇게들 취재해봐야 얼마나 보도가 되려나.”

과연 국내 최대 기업 집단의 그것도 에버랜드 사건처럼 기업 경영권 상속과 직결된 이 중대한 사건이 터진 후 지난 1주일간 매체에 노출되는 정도를 보면 그러한 푸념이 이해가 간다. 어째서 이렇게들 몸을 사리는 것일까. 아마도 사건이 터진 경위에서 무언가 찜찜한 구석들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정도의 대형 폭로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물증은 없으? 있다는 것은 김용철씨 개인의 양심선언 뿐이다. 게다가 삼성 측에서는 그의 행동 동기와 도덕성 등 뿐이 아니라 아예 정신 상태까지 심히 의심스럽다는 공세를 퍼붓고 있는 상황이다. 보도의 '사실성'을 생명으로 하는 매체 종사자들이 선뜻 나서기가 꺼려지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이 ‘팩트(fact)’라는 말은 “만들다(factum)”라는 라틴어에서 나온 것으로, “주어져 있는 것들(data)”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객관적인”사실이란 기실 ‘데이터’에 불과할 때가 많다. 그 누구도 매체가 객관성, 중립성 등을 핑계로하여 관공서 문서나 데이터처럼 아무도 시비를 걸 이유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나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매체는 그렇게 “주어져 있는 것들”을 기초로 하여 사람들이 알 가치가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야” 하며, 그렇게 “만들어진” 사실이 바로 매체의 사명인 ‘팩트’인 것이다.

그 만들어진 것의 사실 여부를 따지는 일을 맡아보는 기관은 따로 있다. 매체는 그것이 가려질 때까지 주어진 데이터에 근거하여 계속 ‘팩트’를 만들어낼 의무와 권리가 있다. 우선 그가 제시한 ‘데이터’가 매체에 의해 ‘팩트’로 만들어지는 것이 급선무이다. 김용철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혹은 정신 이상자인지를 따지는 일조차 그 이후에 본격적인 수사가 벌어진 이후에나 가능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필자보다 훨씬 경험과 생각이 깊은 매체 종사자들이 이런 원론적인 당위의 논리를 몰라서 삼성 비자금 보도를 꺼리는 것이 아니다. 김용철씨에게 삼성 관계자가 했던 것으로 알려진 충고, “이미 모든 매체는 우리(삼성) 편이다”는 그 충고가 실제로 벌어졌는가와 무관하게 한국 사회의 현실을 무겁게 누르는 진실의 힘을 갖고 있다. 어느 매체의 어느 종사자가 손과 입이 뻑뻑해지지 않겠는가. 이 냉엄한 현실 앞에 ‘언론의 도리’ 따위의 호소가 힘을 가질리 없다.

필자는 다른 측면에 대한 사적인 의견을 말하고 싶다. 삼성이 지금처럼 온 한국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은 그다지 오래 가지 않을 것 같다. 몇 년 전 'X파일 사건' 이후 계속 불거져 나오고 있는 일련의 사태와 거기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을 보고 판단하건대 삼성의 '사회 경영'은 너무 ‘크루드(crude)’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삼성이 한국 사회의 모든 면에서 쥐고 있는 장악력은 커져만 가는데 그들이 그것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데에 사용하는 수법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비자금 조성이니 X파일 작성이니 전환 사채 조작 등등의 것들이다.
 
이건희씨는 한때 ‘한국의 정치는 4류’라고 기염을 토했지만 이러한 수법들이야말로 그 몇 십년전의 한국 정치가 사용하던 케케묵은 수법들이다. 90년대 이후 세상은 몇 번을 개벽하여 ‘지구적 자본주의’의 시대가 왔고 삼성은 한국 사회라는 화분에 넘쳐나는 분재가 되었건만, 이들의 구태는 이토록 의연하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했다. 사회적 권력의 배분과 그 작동은 실로 복잡하고 오묘한 논리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크루드’한 방법으로 관리하는 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삼성의 무리한 행태에 대한 폭로가 이루어지고 그러면 매체에 대한 영향력으로 막고 하는 숨바꼭질이 이미 낯설지 않다. 이 장기적인 추세를 읽는 이라면 지금 매체가 겁을 낼 국면이 아님을 알 것이다. 삼성이 정말로 21세기에 걸맞는 진취적인 기업 집단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라도 매체는 그 본래의 역할을 해야 한다. 김용철씨라는 데이터가 이미 나와 있다. 이제 남은 일은 ‘팩트’를 만들어 사방에 뿌려대는 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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