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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한다 l승인1997.04.0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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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방송협회의 방송 70년 행사에 부쳐김우룡<한국외국어대학교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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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우리 방송사의 기점은 어디인가? 올해로 우리 방송은 70년 고희를 맞았다고 해서, 한국방송협회를 중심으로 이를 기념하는 여러 가지 행사와 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한편 kbs는 ‘방송 70년 / kbs 50년’이라고 내세워서 국민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더욱이 지난 3월 3일은 공사 창립 24주년이라고 해서 특집을 마련한 바 있어서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한국을 대표하는 국가기간 방송, kbs는 도대체 몇 년의 역사를 가졌는가? 2월 16일, 3월 3일, 9월 3일, 10월 2일 가운데 어느 것이 우리 방송의 생일인가? 한국 방송의 첫 개국일과 kbs의 생일은 다른 것인가?우리 방송이 우리 국민의 정신적 지주로서 흔들리고 있듯이 한국 방송의 역사도 흔들리고 있다. 정신적으로 방황하기 쉬운 생일없는 소년처럼 한국 방송은 그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는 듯 싶고 제 나이와 생일조차도 제대로 셈하지 못하는 미숙아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우리 방송사의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한다. 아무리 실제 있었던 사실이라고 해도 ‘과거’에 대한 평가를 이제 새롭게 해야 할 때이다.많은 사람들은 한국 방송의 첫출발을 일제하의 경성방송국 jodk가 개국한 1927년 2월 16일로 삼고 있다. 그러나 jodk는 우리 땅에서 전파를 쏘았을 뿐 일본의 방송이라고 해야 옳다. 일제가 ‘내선일체’를 내세우면서 식민지 정책을 강화하기 위해서 시작했던 방송이 바로 jodk였다. 한 여성이 본의 아니게 어떤 치한으로부터 능욕을 당했다고 치자. 이처럼 강제된 남녀관계를 첫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jodk를 우리나라 방송의 시작으로 볼 수 없는 이유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은 일본인 손으로 일본인 기술자들에 의해서 당시 조선에 나와 있던 총독부 관리들과 상공인들을 위해, 그나마 일본말로 시작했던 방송이다. 곧 공기만 우리의 것인지 우리와 직접 관련이 없는 방송이었다.둘째, jodk의 jo는 일본 방송의 콜 레터스(call letters)이다. 콜 사인이라고도 하는 콜 레터스는 국제전기통신연맹 산하의 세계무선주관청회의에서 배정되는데 일제하에서는 ‘남의 이름’으로 방송이 나가고 있었음을 잘 말해준다.셋째, 방송의 역사는 그 나라의 정신 문화 지성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의 역사요, 시대정신의 역사요, 정보주권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극랄한 일제가 한반도 식민지를 영구화하기 위해서 제국방송의 하나로 시작한 경성방송국이 어떻게 우리 방송사의 기점이 될 수 있는가. 한국인의 필요와 편의 공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동포를 황국신민화시키기 위해서 설립되었던 일제치하의 방송이 어떻게 kbs의 효시일 수 있는가.넷째, 어떤 사람은 말한다. 있었던 일을 어떻게 없었던 일로 만드느냐고. 있었던 일을 없애라는 뜻이 아니고 역사적 사실을 냉정한 눈으로 평가하고 우리 방송사를 새로 쓰자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역사를 어떻게 지우개로 지우듯 할 수 있는가.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을 ‘우리 것’으로 삼는 한 방송의 역사는 바로 설 수 없을 것 같다. 가까운 예로 일제의 대한 언론정책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일본방송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없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일제의 대한 언론정책에는 3가지 원칙이 있었다.1) 일본인 우선의 원칙이다. 같은 지역 안에서도 일본인과 한국인을 크게 차별대우 하였다. 한국인의 경우에는 ‘신문지법’을 적용하여 엄격히 통제한 데 반해 일본인들에게는 ‘신문지규칙’을 적용하였다. 곧 한국인에게는 ‘허가제’를 적용, 엄벌주의로 나갔으나 일본인에게는 ‘계출인가제’로 방관적 태도를 보였다.2) 민족분열 조장의 원칙이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친일파를 비호하여 민족진영의 붕괴를 꾀하고 우리 국민 사이의 반목을 조장하였다.3) 민족문화의 말살 원칙이다. 우리 민족의 고유언어와 문자를 말살함으로써 우리 국민의 얼을 근원적으로 배제하는 데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다섯째, 혹자는 주장한다. 경성방송국은 우리 문화의 개발과 보급에 기여한 바가 있다고. 그것은 사실이다. 경성방송국이 뒤에 와서 이른바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방송을 냄으로써 이중언어제를 채택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이뻐서가 아니라’ 대중적 커뮤니케이션 전략이라고 해야 옳다. 곧 일본말을 잘 모르는 한국인들을 상대로 내선일체나 징용 독려 등 식민지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일본의 선전방송이었다. 역사를 고려할 때 잣대가 되어야 할 사항이 있다. 특히 매체의 역사는 △기술 △한 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상황 △그 매체의 활동 내용과 기능 그리고 수요 △집단적 수용자와 그들의 관심이 그것이다. 경성방송국의 운영 목표와 활동내용이 이럴진대 이를 우리 kbs의 전신으로 삼는 것은 무리이다.여섯째, 기술 도입의 역사, 하드웨어 부문은 방송의 경우와 크게 다를 수 있다. 그것은 무색 무미 무취의 가치중립적 성격이 크기 때문이다. 철도의 역사나 우편의 역사 따위가 그것이다. 그러나 제도나 기술보다는 운용이 중요한 방송의 경우에는 역사의 정리가 필요하다. 예컨대 서울대학교의 뿌리는 일제하의 경성제국대학과 그 밖의 여러 전문학교에서 비롯되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사실로서 서울대의 전사(前史)일 뿐이지 서울대학의 기점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1927년 개국한 경성방송국은 우리 방송의 전사로서는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한국 정신사의 출발은 될 수 없다.적어도 우리 방송은 우리나라가 독립을 얻게 되어서 우리 손으로 우리 고유의 호출부호를 갖고서 우리 국민의 정보복지를 시작한 때를 첫 출발로 삼아야 한다.역사는 단절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는 자세는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방송 70년”이란 표현은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 긴 역사가 반드시 자랑스럽지는 않다. 역사 바로세우기는 여기서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그렇다면 kbs의 생일은 분명해진다. 1947년 미군정청으로부터 방송을 인수받아서 우리 손으로 자주적인 편성, 제작을 하기 시작한 날 10월 2일이 그것이다. 바로 이 날을 한국 방송의 날로 삼아야 한다. 종래 방송의 날은 10월 2일이었다. kbs의 창립기념식 역시 이 날이 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무슨 연유인지 10월 2일이 다시 hl호출부호를 할당받은 날, 곧 9월 3일로 바뀌었다.방송70년은 부끄러운 역사이다. 한국방송의 기점을 바로 잡는 일에서 초일류 공영방송이나 신경영은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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