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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영  호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미국에서 밀라이 학살사건은 탐사보도의 금자탑으로 꼽힌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70년 미군이 밀라이라는 한 촌락에서 양민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세이무어 허쉬라는 프리랜스 언론인이 취재하고 DNS(Dispatch News Service)가 보도했다. 그는 이 취재로 플리처상을 수상했다. 


 이 사건이 빛을 보기까지는 숱한 애로를 겪어야만 했다. 사진이 사건의 잔혹성-야만성을 말하고도 남으나 유수한 매체들이 고개를 돌렸다. 펜터곤의 별들이 들고나올 명예훼손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마침내 DNS가 용기를 내어 워싱턴의 유명한 법무법인한테 자문을 얻어 보도했다. 공중의 알 권리는 관련자의 불이익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2006년 4월 4일. 소말리아 해역에서 동원호가 총기를 난사하며 달려든 해적에 의해 나포됐다. 그 때부터 공포와 싸우는 죽음의 순간, 순간이 100일이 넘도록 이어졌다. 마약에 취한 그들이 언제 총질을 할지 모르는 불안에 떨며 말이다. 항해사의 말을 빌리면 중국정부는 전화로 동승한 중국선원의 안위를 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정부한테서는 한 통의 전화조차 없었단다.


 4월 25일. 김영미 프리랜스 PD가 외신이 전하는 현지소식을 들었다. 더듬 영어가 그들의 고통을 표현하지 못해 너무 답답했단다. 안타까운 나머지 생명의 위협도 마다하고 사지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 민중지도자를 만나 신변보장을 약속 받고 마침내 7월 12일 동원호에 올랐다. 항해사는 나포 100일만에 한국에서 날라든 그녀를 수호천사란 말로 그 때의 기쁨을 표현했다.


 2박 3일간의 취재가 이어졌고 7월 25일 MBC 'PD수첩‘을 통해 그 살 떨리는 공포의 현장이 전파를 탔다. 방영 5일 후, 억류 117일만에 그들이 풀려났다. 그 때까지 주류언론은 서울에 앉아서 외교통상부의 브리핑에나 매달렸다. 그것도 소말리아가 아닌 두바이에서 동원수산을 내세워 협상을 벌인다는 소식을 말이다. 국민은 듣도 보도 못한 오지에서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알 길이 없었다.


 느닷없이 외교통상부가 반론보도를 MBC에 요청했다. 취재 당시에는 반론권을 거부해놓고는 말이다. 이유도 가당찮다. “일개 프리랜서의 검증되지 않은 취재내용을 보도한 것은 MBC의 사회적 책임과 영향력에 비취어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뉴 미디어시대를 맞아 인터넷 매체에서는 시민기자의 활동이 왕성하다. 한편의 UCC가 세상을 바꿔놓을 판이다. 언론활동을 하는데 면허증이라도 받으라는 뜻인지 모를 말이다. 


 그보다는 아마 김 PD가 미운 털이 박히지 않았나 싶다. 방영 뒤 외통부가 그에게 내린 출국금지가 그것이다. 그는 자이툰 부대 파병 당시 이라크에서도 취재한 바 있다. 그가 다시 이라크에 들어가려다 비자를 받지 못했다. 외통부의 압력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 때도 출국금지로 발목이 잡힌 적이 있다.


 반론보도란 언론보도에 따른 피해구제이나 일반적으로 사회적-경제적 약자를 위한 제도이다. 그런데 막강한 정부부처가 그것을 남발하고 법원마저 그 편을 들면 위축효과(chilling effect)를 낳지 않을 없다. 겁먹은 언론인이 취재를 기피하기 마련이다. 또 반론문이 게재되면 시청자가 취지와 달리 오보로 잘못 인식하는 함정을 지녔다. 반론보도가 언론자유를 억압하는 제도적 장치로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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