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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CBS PD(‘김현정의 이슈와 사람’ 진행)

 

아침 9시. 언제나처럼 회의가 시작되었다.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에서 아이템 선정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정이기에 가장 열기 띤 시간. 그 날도 그랬다. 제작진이 머리를 맞대고 있을 때 누군가 '자살'이란 아이템을 제시했다. “식.상.해.요” 내 의견이었다.


 1월 초 가수 고 유니의 죽음으로 시작된 자살 뉴스는 탤런트 고 정다빈의 죽음까지 이어지며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왔던가. 나올 얘기는 다 나온 것 같고 그만 다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뾰족한 대안이 눈에 띄질 않았고 결국 ‘자살’이란 아이템이 마지못해 낙찰되었다.


 ‘자살’은 그날의 마지막 이슈. 서울시광역정신보건센터 상담원과의 연결이었다. “삶을 고민하는 분들의 99%는 말 할 상대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누군가 옆에서 들어주기만 해도 되는데...” 원인은 외로움. 대책은 들어주기였다. 이 얼마나 추상적인가. 역시 썩 만족스럽지 않은 인터뷰라고 생각하며 마지막 질문 하나를 던졌다. “혹시라도 지금 삶을 고민하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몇 번으로 전화하면 될까요?”

 

“1577-3700. 전국 대표입니다. 큰 도시에 몇 곳 있으니까 가까운 지역을 안내해 드려요” 그저 무난한 인터뷰를 마치고 사무실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오기가 무섭게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이건 방송을 마치고 나면 으레 걸려오는 일반적인 ‘문의 전화’들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그 중에서도 내가 잊을 수 없는 건 두 번째 걸려온 전화였다.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조금 전에 몇 번으로 걸면 된다고 하셨죠?” 50대로 느껴지는 차분히 가라앉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1577-3700으로 하셔서 지역을 말씀하시면 가까운 곳을 안내해 드립니다” 안내양같은 나의 답변에 그녀는 실망한 듯 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답한다.
“제가 사는 곳은 여수에서도 아주 시골인데... 없을 것 같은데...” “아, 시골이세요? 어쩌죠. 저희도 방법을 잘 모르겠는데 일단 대표번호에 걸어서 상의해보시죠.”


더 이상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으랴, 전화를 막 끊으려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작은 흐느낌이 느껴졌다. 그녀는 울고 있는 듯 했다. 도저히 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 이대로 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제게라도 말씀하시겠어요?’ 속으로는 외치고 있는데 입으로는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 어쩌죠...” 안절부절 하는 내 답변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알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날 오후 내내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OECD 국가중 자살률 1위’ 자살에 관한 많은 방송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과연 얼마나 신중하게, 위기의 생명들을 살리고 있을까? 연예인의 죽음을 다루면서 혹시 미화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그저 뉴스의 한 아이템으로 경제뉴스, 정치뉴스와 다를 바 없이 그리고 있지는 않은가?

 

외로움에 떨던 여수 한 시골의 그녀에게는 라디오가, TV가 유일한 친구였을 것이다. 우리가 오늘도 청취율을, 시청률을 생각하며 만드는 그 방송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유일한 해답일 수도 있다. 여수의 그녀는 어떻게 됐을까? 나는 아직도 ‘그녀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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