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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미 EBS PD ('시네마 천국' 연출) 

지난 주말, EBS의 미래를 고민하는 모임을 가졌다. 모임의 참석자는 EBS의 막내 피디들이라고 할 수 있는 내 동기들과 후배들. 물론 자의적으로 그런 착한 짓을 한 것은 아니고 무엇인가 꼭 결과물을 내야하기에 마감 전날 억지로 겨우겨우 모인 자리였다. 처음 시작은 거창했다. 우리가 가장 어린 막내들이니까 뭔가 EBS의 희망찬 비전을 제시하자! 밝고 기운차게 가자! 모두 그러자며 동의했다.

하지만 한잔 두잔 술이 들어가고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자신들의 기운차지도 밝지도 않은 생활을 털어놓다보니 희망찬 비전은 사라지고 허무한 넋두리만 남는다. ‘왜 우리는 회사에 들어오자마자 위기감을 느껴야 하고, 대책을 고민해야 하며,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까’ 라고 묻는 후배님들의 기운 빠진 목소리를 도피나 어리광으로 절대 들을 수 없는 것은 연출자로서의 소망과 재주를 채 보여주기도 전에 벌써 그들의 꿈을 제약해버리는 현실적인 조건들이 참 싫기 때문이다. 나도 참 그게 싫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꽁알꽁알거리며 불평도 많았다.     

2주전 주말, 후배들의 연극공연이 있다고 해서 오랜만에 학교에 갔다. 내가 처음 공연을 했던 대강당 무대는 너무 그대로였다. 학교의 다른 건물들은 워낙 치장을 해놓은 탓에 영 적응이 안됐는데 무대는 너무 똑같아서 또 적응이 안됐다. 한 100년은 된 것 같은 의자와 책상, 일일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조명을 달아야 하는 옛날 무대까지. 그리고 신입생들의 어색한 연기와 되지 않는 발성과 아무렇게나 대충 발라놓은 듯한 엉망인 분장까지. 내가 했던 그대로다. 그들은 ‘비언소’에 있었지만 왠지 세상 사람들의 찌꺼기를 쏟아버리는 변소 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간만에 만난 사람들도 예전과 똑같았다. 언제나 몸개그를 보여주던 선배는 여전히 몸으로 웃겼고, 두목 노릇을 하던 친구는 여전히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렇게 다시 모이니까 옛날처럼 찌질해지는 건지. 뭔가가 바뀌었는데 계속 그대로인 상태. 회장님이 잡혀들어가 있는 모 그룹에 다니는 후배를 놀리면서 좋아하고 아기 사진을 보여주는 선배 닮아서 머리가 크다며 유치하게 굴 수밖에 없는 그런 것. 이젠 깜찍발랄이 아니라 모자라 보이기는 하지만 나쁘지는 않다. 

무엇인가에 미쳤다가 시간이 흐르고 무언가에 익숙해지고 적응을 해가고 그래서 조금씩 나태해지고 게을러지는 건 나 혼자 사정이지 다른 것들은 늘상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살면서 계속 자리를 바꾸며 이 패턴을 무한반복하고 있는 건 아닐지. 그래서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위기이고 미래의 비전을 고민하고 하지만 방향을 찾지 못한 채 여전히 그렇게 굴러가고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내가 총총한 기운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을 기대해봤자 역시 똑같이 반복되는 것일 뿐. 어떤 것을 기회로 그 반복을 끊어야 무언가 달라지는 것일까. 내가 아직 못하는 변화를 읽는 거시적인 것이든, 내가 한주 한주 하고 있는 세세한 일을 하는 것이든 되도록 총총한 기운을 가지고 달릴 수밖에 없겠다. 무언가 달라지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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