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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교양문화팀 김한중PD

출장에서 돌아와 사내메일을 열었다. 두가지 메일이 눈에 띄었다. 하나는 PD연합회에서 또 하나는 사내 인사팀에서 온 것이었다. ‘PD프로그라모그라피’ 입력을 재차 독려하는 연합회로부터의 메일, 그리고 다음주 창사기념식 10년근속자 시상에 참석하라는 내용의 사내메일이었다. 벌써 10년이라니…빠르다.

지난 10년간의 프로그라모그라피를 작성해보기로 했다. 마치 자서전을 쓰는 마음으로 짐짓 경건한 표정도 지어보았다. 주민등록번호 이름 주소 학력 메일주소를 쓰니 드디어 프로그라모그라피 첫 번째 줄을 입력할 차례가 됐다. 두근두근...날짜는 1997년 8월…그리고…이런…없다. 쓸 프로그램이…내 프로그라모그라피 첫 줄이 없다.

10년전 입사 때, EBS는 파업중이었다. 그것도 거의 두달 째. 수습사원인 나는 위성주조정실의 MD로 발령을 받았다. MD가 뭔지도 모르는 10년 전 나에게 한 선배가 말했다. 최소 10년 차는 돼야 할 수 있는게 MD라고. 그래서 그게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그런데 그 일은 결국 파업중인 선배들의 대체근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때 난 방송국 주조정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사고를 저지르며, 또 목격하며 파란만장한 수습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어느 덧 10년. EBS는 어떻게 변했을까. 10년전 선배들이 지향했던 EBS의 모습은 과연 지금 얼마나 구현되고 있는 것일까. 교육방송공사로 바꿔 단 간판, 그러나 간판 뿐인 시스템, 다섯 번이나 바뀐 사장, 노골적인 낙하산 인사,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부족한 공적재원 문제...누군가가 말했다. 어떤 조직의 현재를 보려면 10년 전 뽑은 사람을 보면 된다고. 처음엔 이 말이 뭔 말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알면서도 모른 척 하고픈 심정이다.

일단 프로그라모그라피 두 번째 줄부터 작성하기로 한다. 그런데 그럴 수는 없게 돼있다. 첫 줄엔 뭐라도 써야 한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쓸 수는 없는 일이다. ‘위성주조정실 대체근로’라고 쓰고 싶진 않다. 문득 떠오른 말. 이건 나의 숙명이다. 영원한 부채감이다. 갚아야 하는데 여유는 없다. 인사팀에 전화를 했다.

10년 근속자 시상식에는 참석할 수 없다고 촬영 핑계를 댔지만 그건 정말 핑계였다. 첫 줄만 제대로 완성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지금 EBS가 10년 전의 지향점에 서있다면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될 텐데. 아마도 시상식은 앞으로 10년동안 빚을 좀 갚고 참석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프로그라모그라피 업데이트도 그 때 쯤 근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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