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수의 방송 맛 보기] '낭독의 발견'과 낙지
상태바
[홍경수의 방송 맛 보기] '낭독의 발견'과 낙지
  • PD저널
  • 승인 2007.03.04 20: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얼마 전 녹화를 마친 다음날, 늦게 일어나 아침상을 물리고 거실에 있다가 다섯 살이 된 쌍둥이들과 창밖을 보다가, 흰 눈이 희끗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낭독의 발견>이 생겨나고 11일 후에 태어난 쌍둥이들은 이제 말이 제법 늘었습니다. 며칠 전 딸애는 "아빠, 제가 장난감을 발견했어여"라며 발견이라는 산문투 어휘를 구사했습니다. 발견이라는 단어에 깜짝 놀라서 아버지가 만드는 프로그램 이름을 따라하게 했습니다.

 

 "윤서야, 아빠가 만드는 텔레비전 방송이 '낭독의 발견'이야. 따라해 봐"
 "낭독에 발견?"
 "응"
 "아빠, 테레비 방송 낭독에 발견!!!"
 "그래……."

 

 흰눈이 그쳤다가, 다시 눈이 내리고…….

 다시 강바람과 함께 흰눈이 휘몰아칩니다.

 "와, 눈 와, 아빠, 눈이 왜 빨리 와요?"
 "바람이 불어서 눈이 빨리 오는 거지……."

 아이들의 눈동자는 반짝반짝입니다.

 "야, 신기하다"

 

 쉬는 날 오전, 눈 내리는 모습에 마음에도 흰 눈이 쌓입니다. 러브스토리의 주제가도 떠오르고,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에 나오는 풍경도 떠오릅니다.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백건우의 라흐마니노프도 잘 어울립니다.

 "백건우씨도 낭독무대에 초대해야 하는데……."

 

 생각은 다른 곳으로 튑니다. 생뚱맞지만, 아침에 시골 어머니께서 고속버스 편으로 부친 산 낙지도 부지런히 올라오고 있습니다.

 "낙지 먹기 좋은 날이다" 

 독백을 하며 저녁에 있을 모임을 기다리며 흰 눈을 바라봅니다. 아이들은 창가를 떠나지 않습니다.

 

 소파에 앉아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줍니다. 어릴 적 집에 불이 난 어린이가 엄마가 일하는 블루타일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팁을 유리병에 모아서 어머니가 좋아하는 빨간 벨벳 의자를 산다는 내용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할 때 가장 힘든 일은 책을 읽어주는 일입니다. 한두 번은 읽어주는데 세 번은 읽어주기가 어렵습니다.

 

 시간은 흘러, 드디어 6시경 낙지가 퀵서비스 오토바이를 타고 집에 도착했습니다. 눈이 와서 예정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고 배달기사는 미안해합니다.

 

 조금 있다가 동네의 후배들이 도착했습니다. 총 세 가족과 한 싱글. 우선, 브리 치즈에 루마니아 산 와인을 마시고, 산 낙지를 훑고, 좃아서 먹습니다. 산 낙지와 함께 도착한 참기름과 된장과 함께. 참기름 향에 놀라고, 낙지의 쫄깃함에 놀라는 탄성이 나오고, 와인은 이제, R.H 필립스 메를로 2002 로 바뀝니다.

 

참기름을 담은 공기에 산 낙지를 쓸어 담아 후루룩 마시는 친구도 있고, 이야기하며 먹느라 바쁜 친구도 있습니다. 일곱 명이 뻘 낙지 20마리를 다 먹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화이트 와인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와인과 산 낙지의 조합…….처음 먹어보았습니다만, 잘 어울립니다. 해산물이라 화이트 와인이 어울릴 듯하지만, 적포도주도 좋은 듯합니다.

 

 불고기에 낙지 머리를 넣은 불낙을 만들고 낙지 미역국을 끓여서 식사를 합니다. 한 친구가 김치와 불낙과 참기름을 넣어서 볶음밥을 만듭니다. 후식으로 딸기와 홍차. 다들 가득 찬 배로 괴로워하며 이야기로 소화를 시킵니다. 앞으로 우리가 먹어야 할 것들…….생합, 떡갈비, 전복, 소고기 육회, 홍어…….

 

 열시가 넘어 친구들이 떠나고 문자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새해 마당에 또 내리는 눈:

  차마 밟지 못하고,

  저 순한 마음의 파스 한 장,

  당신 등짝에 붙치려오.”

  - 지우.


 오래 전에 낭독의 발견에 출연하셨던 황지우 시인께서 인 사를 보내오셨습니다. 뜻밖에 내린 서설이 시인의 가슴을 움직였습니다. 시인에게는 끄적거리는 것도 문자메시지도 시입니다. 고마운 정성입니다.

 

 신영옥씨 녹화가 있던 날에는 시골 어머님께서 상경하셨습니다. 습관처럼 산 낙지 20마리를 사오신 어머니는 저녁에 낙지를 먹으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녹화가 있는 날 꼼짝달싹 못하는 피디의 몸. 도리어 어머니를 녹화장에 초대했습니다. 물론 산 낙지를 손질해 오시라고 부탁드리고. 녹화하기 30분 전 분장실에는 시골에서 갓 짜온 참기름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꿈틀거리는 산 낙지를 가위로 잘라 된장과 고추를 더해 먹었습니다. 카메라, 기술스태프, 작가 등 20여명이 충분히 먹고도 남았습니다. 황수경 아나운서도 생전 처음으로 산 낙지를 맛보았습니다.

 “낙지가 고소하고 다네요”

 처음 먹어본 사람치곤 정확하게 맛을 집어냅니다.

 

 실제로 낙지에서는 깊은 단맛이 우러납니다. 이것은 갯벌에서 우러난 맛이 낙지에 밴 것에 다름 아닐 터인데, 여수 쪽이나 남해바다의 낙지는 낙지라고 할 것이 못 됩니다. 오로지 전남의 서해안 즉 함평과 무안의 낙지만이 최고의 맛을 내는데, 두 지역은 황토로 이름난 지역이며 곡창지대입니다. 내륙의 토지의 특성이 갯벌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고, 그것이 낙지의 풍미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상관관계를 유추해볼 따름입니다.

 

 <낭독의 발견>이 이번 주 방송으로 150회를 맞이합니다. 만 3년 4개월의 결코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낙지처럼 쫄깃하고 고소하고 단맛을 내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 깊은 맛을 내기 위해 황토처럼 진솔하고 풍부한 문화적 토양을 가진 스태프들도 모셨습니다. 깊이 감사드릴 일입니다.

 

 음식 자랑만 하고 말았습니다. 안타깝게 낙지 철은 지나갔네요. 또한 부모님이 서울로 이사를 오셔서 낙지를 들고 오실 일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앞으로 방송과 맛의 상관관계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맛있는 방송을 꿈꿉니다.

 


 

홍경수 KBS 문화예술팀 PD


  현재 <낭독의 발견>을 연출하고 있으며, 맛있는 음식 먹는 것을 좋아한다. PD지망생들을 위한 < PD, WHO & HOW >를 대표 집필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