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진의 타블라 라싸] 세렌디피디...가죽바지 입는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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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렌디피디'란 제목의 영화가 있었다.
뉴욕의 한 백화점에서 x-마스 선물을 고르다가 하나 남은 상품을 동시에 잡은 두 남녀가 '우연한 행운'의 사랑을 시작하는 그런 러브스토리 영화였다.
내가 "가죽바지"를 만난 것도 그런 serendipity(우연한 행운)였다.
 
내 영화의 첫 장면은 새 밀레니엄을 앞둔 '99년 겨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시작되었다.
친한 후배 탤런트와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즐기고 있는데 그의 핸드폰에서 요란스런 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후배 탤런트는 바쁘다며 퉁명스럽게 끊어버렸고, 그의 평소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 나는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팬’인데 처지가 좀 딱해 따뜻하게 대했더니 하루에 대여섯 번씩 용건 없는 전화를 하네요.
“팬?”
“양복점에서 재단보조를 했는데 얼마 전 실직을 했대요. 주변에 바지 맞출 사람 좀 소개시켜 달라는데, 배우들은 모두 협찬을 받으니까 도와줄 방법이 있어야죠."

 

" 기술은 좋나 봐요! 가죽바지도 만들 줄 안대요." " 근데 소아마비라서 직장 구하기가 쉽지 않나 봐요"
"소아마비?"
“네, 한쪽 다리를 약간…….”
"야. 당장 치수 재가라 그래!"
“예??”"
“그 친구 가죽바지 전문이라 했지?!”
"예? 예! 가죽바지요"
그리고 딱 열흘 뒤 내 인생 처음으로 가죽바지 하나가 집으로 도착했다.

 

* * 벌써 8년째 나는 가죽바지로 겨울을 나고 있다. 매년 11월이면 나는 ‘가죽바지 입은 사내’가 되었다가 다음해 3월 꽃샘추위가 물러가면 비로소 벗어난다. 개수도 늘어나서 무려 다섯 개가 되었다. 이런 연유로 주변사람들에겐 가죽바지가 내 페르소나가 되었고 내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렸다.

 

수천 명이 종사하는 일터에 가죽바지를 입은 사내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런 희귀성 때문에 사람들의 눈길도 끌고 또 입길도 끌게 된다. 혹자는 착용감이나 가격이 궁금한 모양이고 또 혹자는 참새떼 같이 입방아를 찧기도 하는 모양인데 나도 그 수군댐의 까닭을 모르는 바 아니다.

 

궁금증에 대한 답은 이렇다.
첫째 가죽바지는 따뜻하고 편하다.
둘째 값이 싸고 반영구적이다.
셋째 멋도 있다.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있을 거 같아 임상사례 하나를 들겠다.
그 "팬"이 맞춰 준 바지를 입고 겨울을 난 후 깨달은바 커, 당장 하날 더 맞춰 시골에 계신 아버지께 한번 입어보시라 권했다. 그런데 당사자보다 옆에 계시던 어머니가 놀라서 더 펄쩍 뛰었다.
"얘야! 너나 입어라. 점잖은 양반이 그걸 어떻게 입고 다녀!"
"그럼 아주 추운 날 집 안에서만 입어보세요. 그리고 마음에 안 들면 꼭 돌려주세요."
다음해 명절에 갔더니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얘! 얘! 참 별일이다! 아버지가 그걸 한번 입더니 아주 벗지를 않으신다!"
"너 입다가 닳거든 또 달라고 그러시더라."
가죽바지는 장년들의 시린 무릎에 특효 중 특효다! 늙으신 부모님을 둔 불효들에게 가죽바지 선물을 강권하는 바이다.
"부모님을 사랑하시압!"

 

가죽바지 입은 사람을 아주 별난 사람으로 보며 입방아를 찧는 참새떼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간은 원래 가죽옷을 입었다우!”
우리의 선조들은 가죽옷을 입고 숲과 들판을 달음질치며 삶을 영위했고 종족을 지켰다. 그것도 가죽바지가 아니라 가죽치마였다.
이것은 역사의 '가나다라'를 모르더라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가죽바지를 입는 일은 일종의 '온고이지신' 이다.

 

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가죽바지를 입는 것은  분명 파격이며 별남일 수 있다. 그러나 어찌 보면 답습과 획일로 부터의 탈출행위이기도 하다.
문화를 창달하는 직업인인 내게 획일과 답습은 입어서는 안 될 족쇄이고 마셔서는 안 될 독(毒)이다.
나는 추호도 남의 작품을 답습하거나 내 작품을 답보하는 프로듀서이고 싶지는 않다.
별나다는 편견에도 불구하고  가죽바지를 고수하는 내 의식의 한켠엔  답습과 획일로 부터의 탈출이라는 몸짓 언어가 들어 있다.
연민으로 출발한 가죽바지와의 만남, 그 우연한 행운은 따지고 보면 직업인으로서의 내 신조까지 다지게 하는 더 큰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빌어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참새떼와 거위떼가 함께 입방아를 찧더라도 가죽바지와 이별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임! ” 
                               
 

 

이응진 / KBS 드라마팀 PD , 문화칼럼니스트

 


 대표작으로 1994년 최수종과 배용준. 그리고 이승연,최지우가 출연한드라마 <첫사랑>과 <딸부자집> 등이 있으며  2004년 KBS 연수원 교수로 활동했다. 현재 'HDTV 문학관' 을 제작 중이다.  '타블라 라싸'는  흰 백지 상태를 의미한다. 어린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순백의 상태를 말하듯 철학자 루소는 교육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이 말을 사용했다. 흰백지 위에 생각을 쓰자는 의미에서 이 칼럼이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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