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수의 방송 맛 보기] '가요무대'와 멸치국물 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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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여 전에 가요무대 조연출을 했다. 기발한 상상력과 추진력으로 유명한 최공섭 선배와 가요무대를 맡은 것이다. PD, AD가 함께 바뀌었고, 우리는 열정을 가지고 덤볐다. 선배는 시작부터 거창한 기획안을 준비했다. 400여명의 시청자를 초대해서 트로트 가수와 함께 1박 2일 여행하는 프로그램 ‘가요무대 여름가족여행’을 기획한 것이다. 철도청의 협조를 얻고, 시청자의 신청을 받아 100가족 400여명을 뽑았다. 충남 보령군청에서 숙식을 협조해주셨고, 기차 지붕에 ‘가요무대’라는 글자도 크게 새기고 헬기 촬영까지 했다. 그야말로 프로젝트다.

 

기차를 타고 보령으로 내려가는 과정을 찍기 위해 선배는 중계차를 분해하여 기차에 탑재하고는 기차 안에서 가수들과 가족들의 노래와 춤을 녹화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피디 두 명이 이런 큰 프로젝트를 그것도 매주 정규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추진했는지 놀랍기만 하다.

 

당시 이 프로그램을 취재했던 중앙일보 권혁주 기자는 방송상 수상 가능성이 있다며 사무실에서 함께 숨죽여 방송을 보았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해보니 불똥이 떨어졌다. 기차 안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 문제가 된 것이다. 관광버스 안에서 춤추는 것이 문제가 되던 시기인지라, 객차 안에서의 가무가 연상효과를 일으킨 듯하다.

 
삽화 1. 가요무대 여름가족여행을 보도한 중앙일보 기사

기획하고 추진한 선배에게 부담이 되긴 했지만, 선배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부모님을 위해 신청하는 자녀에게 우선권을 주는 ‘효초대권 제도’를 도입하고, 연말에 불우이웃을 모셔서 식사를 함께 대접한 패키지형 연말특집을 준비하고, 탈북자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모은 특집 등 특집 릴레이를 펼쳤다.

 

조연출인 나도 선배의 열정에 감복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선배는 재깍 수용해주었다. 획일적인 예고프로그램에 시를 직접 써서 음악과 함께 흘린 예고를 만들어보았고, 대학응원가 특집, TV 동창회 특집, 한달에 한번씩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특집으로 UP, NRG 등 10-20대 취향의 가수와 유열, 인순이 등 열린음악회 가수, 그리고 트로트 가수가 함께 트로트를 부르는 공연을 기획했다. ‘가요무대가 한달에 한번 마법에 걸립니다’ 라는 카피를 내걸기도 했다.

 

그리고 가을 어느 날……. 트로트가 가지고 있는 느끼함이 부담스럽던 차에 해금된 월북 작곡가들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연락선은 떠난다>, <서귀포 칠십리>, <목단강 편지>,등.....

 

파도는 출렁출렁 연락선(連絡船)은 떠난다/ 정든 님 껴안고 목을 놓아웁니다/ 오로지 그대만을 오로지 그대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한숨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아이 울지마세요 울지를 말아요'
-박영호 작사, 김해송 작곡, 장세정 노래 <연락선은 떠난다> 에서

 

1937년에 만들어진 노래는 현해탄을 오고가는 연락선에 얽힌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담고 있다고 한다. 가사도 가사지만 트로트의 느끼함은 온데 간데 없는 담백한 노래 맛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부제를 이렇게 달았다. ‘멸치국물 담백 트로트’.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자연 재료 그대로의 맛을 대표하는 것이 멸치국물이라는 생각에서다. 쓸쓸하고 소슬하고 정갈한 느낌을 주는 트로트의 맛은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있다.

 

입맛이 떨어진 요즘, 즐겨 먹는 음식이 국수 등 면류다. 얼마 전 술자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잠자고 있는 아내를 깨우지 않고 혼자 국수를 끓여 보았다. 요리법이라야 그다지 어렵지 않다. 우선 냄비에 물을 담아서 끓이다가 국물용 멸치 5마리와 다시마 몇 조각을 넣고 10여분 중불로 끓였다. 멸치와 다시마를 건져내고 참치액 젓갈 한 숟가락을 넣으면 국물이 완성된다. 그리고 다른 냄비에 물을 끓여 국수를 삶는다. 5분 동안 삶은 뒤 곧바로 찬물로 헹궈 쫀득하게 하고는 물을 빼고 멸치 국물에 넣고 1분정도 덥힌 다음 면기에 담아내면 된다.

 

삽화 2. 멸치국물 국수. 깔끔하고 담백한 맛이 속풀이로도 괜찮다.

요리책에는 맨 마지막에 취향에 따라 대파나, 김 등을 얹어서 드시면 된다고 쓰여 있다. 나의 경우는 가츠오부시와 김치 썬 것을 얹어 먹는다. 부른 배에 아무것도 들어갈 것이 없어 보였지만, 시원한 멸치국물은 술술 들어가고 속을 편안하게 해준다. 결국 국수는 남기고 국물은 다 마시고 숙면을 취했다. 물론 아침에 눈두덩이 붓긴 했지만…….

 

트로트를 두고 말이 참 많았다. 왜색 때문에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고, 고급스럽지 않다고도 한다. 뽕짝이나 트로트라는 이름이 싫어서 전통가요라는 말이 대체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유학생이나 이민자들이 가장 애타게 찾는 것이 트로트 음반이고, 실제 노래방에서도 트로트의 인기는 만만찮다. 트로트가 우리의 생활과 밀착해 있는 것처럼 가요무대도 하나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문화다.

 

누군가는 트로트가 청국장이나 된장국처럼 구수하다고 한다. 하지만 트로트에는 우리의 마음을 서늘하게 하는 노래들도 적지 않다. 우리의 성정을 표현하고 마음을 위로해 주는 노래. 가요무대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때로는 술 먹은 술꾼의 속을 달래 줄 담백한 멸치국물과도 같은 시원함일지도 모른다. 불혹 혹은 초로에 들어선 내가 이젠 가요무대의 타깃 오디언스가 되었다. 가요무대에 대해 한마디 하기에 이제 너무 젊지는 않은 것이다. 서른을 갓 넘은 내가 무엇을 안다고 그렇게 가요무대를 재미있어 하며 조연출 했는지는 아직도 미지수다.


 

홍경수 KBS 문화예술팀 PD

 


 

현재 <낭독의 발견>을 연출하고 있으며, 맛있는 음식 먹는 것을 좋아한다. PD지망생들을 위한 < PD, WHO & HOW >를 대표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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